과천·안양지역은 동남으로는 한남정맥의 주봉을 이루고 있는 광교산(光敎山)을, 동북으로는 관악산(冠岳山)과 청계산(淸溪山)을 울타리로 한 분지에 위치하면서도 역사발전의 거점도시로 성장해온 교통의 요지다. 일찍이 경기 5악의 하나로 꼽혀온 관악산은 한강 수계와 서해(西海)로 흐르는 수계의 분수령인 한남정맥과는 별개로 우뚝 솟아 삼남의 길목에 버티어 서고 한강을 앞자락에 품어 기나긴 민족사의 여울물 소리를 간직한 과천의 상징이다. 그래서 과천의 행정지도는 다른 어느 지역보다 변화가 무쌍했다.

과천군읍지에 보면 관악산을 주산으로 읍치가 있고 동쪽으로는 청계산이 광주와 경계를 이루었고 서쪽으로는 안양천 석교가 시흥과 경계를 이루었으며 수리산과 태을산이 서남으로 둘러있다. 북으로는 노량진과 동작진, 한강진 양재천교가 경계를 이루었고, 관내를 흐르는 하천은 학고개천, 군포천, 인덕원천, 하상천, 국일천, 공항천이 있고 우면산이 관내에 있었다. 이 지도로 볼 때 안양과 군포 의왕은 관내의 한지역으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과천은 역사적으로 왕도인 개성과 한양을 잇는 대각선 축의 교통요지였고, 조선시대는 수도 한양의 남쪽 관문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군사 등 길목으로서의 교류와 전파, 그리고 변화에 민감한 흡수·통합이 빈번했던 고장이었다. 또 인접한 시흥과 통합분리를 반복하며 오늘에 이른 과천의 최근 역사는 오늘날 수도권지역의 행정구역 통폐합이 빈번했음을 말해주는 증언자이기도 하다.

삼국시대 백제의 영역에서 출발하는 과천지역은 고구려의 남진기에는 율목군(栗木郡)이었다. 이때 생활권이었던 지금의 서울지방은 잉벌노현(仍伐奴縣)이었다. 신라의 통일이후 경기 일원이 한산주(漢山州)로 될 때 과천지역은 율진군(栗津郡)이었고, 고려 태조 23년(940년)에 과주군(果州郡)이 되었다가, 고려 성종 10년(991년) 부림·부안을 거쳐,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 과천현이 된다. 이때 과천과 영역을 맞대고 있는 시흥지역은 940년에 금주현(衿州縣), 991년에 시흥(始興)이란 지명을 얻게 된다. 그러던 것이 태종 14년(1414년)에 이르러 과천과 시흥이 동일 영역이 되면서 금과현(衿果縣)이 된다. 이때는 왕조창업의 초창기다. 행정구역 통폐합의 대상으로 다시 과천이 해당된 것이다. 그 해에 다시 과천은 금과현, 시흥은 금양현이 되었고, 태종 16년(1416년)에 일시 시흥이 분리되어 금천현이 되었다가, 단종 3년(1456)에 다시 금과현으로 통폐합된다. 세조 8년(1462년) 과천현이 된 이후 1895년에 과천군이 되었고, 일제강점기 들어 행정구역이 최초로 개편된 1914년에는 금천·금과·시흥의 변천을 거듭하며 호형호제한 시흥과 합하면서 시흥군 과천면이 된다. 이후 과천은 1936년 1차 서울시에 편입되었다가 1949년 2차 편입, 1963년 3차 편입되는 우여곡절을 겪다가 1973년 관내에 있던 안양지역이 시로 승격된다. 이후 1982년 과천지구 출장소가 개소되면서 군포시가 시로 승격되어 떨어져 나갔고, 1986년에 비로소 시로 승격 되면서 중앙, 갈현, 별양, 부림, 과천, 문원의 행정동을 가슴에 품고 오늘에 이르렀다. 한지붕 과천·시흥의 생활 역사 문화권역에서 세 살림을 해야했던 같은 형제의 정감이 교차하는 안양, 군포, 의왕의 어제와 오늘은 이렇게 멀고도 긴 역사의 궤적이다.

고조, 증조, 조, 부의 4대조 그늘에서 한핏줄 동족의 가계와 생활정서를 같이하는 것이 한국인의 기질이다. 역사를 일관하여 흐르는 치열한 도전정신 속에서 오늘의 한국인, 그 도도한 생명력의 본질은 그 정신을 일깨우는 한국인의 역사와 문화일 수밖에 없다. 과천, 안양의 역사현장에 답사반의 족적이 지문처럼 묻어난다. 지금은 작고한 과천, 안양, 시흥, 안산지역을 대표하는 향토사학자 이승언씨의 기록을 살펴본다.

안양이란 지명은 고려 태조 왕건이 궁예의 휘하에 있을 때인 900년(신라 효공왕 4년)에 지금의 서울시 일원인 금주와 현재의 과천인 과주를 정벌할 때, 삼성산(三聖山) 오색구름의 계시에 따라 마음을 편안히 하고 몸을 양(養)한다는 뜻에서 사바세계의 서쪽 안양정토(安養淨土)에서 따와 유래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석수동 산 53의3, 삼성산의 능선자락에 남아있는 삼한시대에서 삼국시대로 이어지는 문화유적, '석수동 석실분'을 찾은 답사반은 안양을 한눈에 굽어보는 그 탁트인 전망에서 역사는 결코 외롭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횡혈식(橫穴式) 돌방무덤, 규모는 길이 3.4~4.5m, 너비 1.5~1.7m, 높이 0.85~1m인 이 석실분에서 금귀고리가 나왔다는 것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시대를 초월한 여인사의 일단을 말해주는 것, 한치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사의 생활궤적이 또한 이곳에 있었음을 아는 순간이다.

이어지는 답사반의 발길은 정조대왕의 능행길을 반려한 역사유적지들인 사근행궁터, 인덕원, 안양행궁지, 만안교를 돌아나오고, 또 안양시의 지명유래를 정신적으로 뒷받침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