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양유원지 입구 한 제약회사의 정문 안쪽에 남아있는 중초사지 당간지주와 삼층석탑. 보물 제4호로 지정된 중초사지 당간지주에는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광교산에다 주봉의 역할을 맡긴 한남정맥은 북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지지대 고개를 만들어 놓고 의왕시의 오봉산으로, 또 수리산으로 숨가쁘게 올라간다. 그러나 북수원 인터체인지와 1번 국도 등 수많은 도로와 경부선 철로가 지나면서 한남정맥은 그 흔적을 찾기 어려울 지경으로 훼손된다. 더구나 부곡역 옆의 한 골프장에 이르면 아예 만신창이가 된 느낌을 지울 수 없으니 옛사람들이 1대간 1정간 13정맥으로 국토를 인식하였던 지리 의식에 송구스러울 따름이다.

#오디의 단맛에 담긴 슬픔

수리산의 가장 긴 골짜기는 수암천을 이루고 이내 안양천에 합류하여 한강에 이른다. 흔히 '병목안'으로 알려져 있는 계곡이다. 이 골짜기 그윽한 곳에 '담배촌'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마을이 있다. 조선조 헌종 3년(1837)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와 담배 농사를 지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 최경환 성인(聖人·1805~1839)인데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이다. 장남 최양업을 신부로 만들기 위해 마카오로 떠나보내고 닥쳐올 박해를 피해서 이 깊은 골짜기로 들어온 것이다. 고향인 충남 청양을 떠나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고생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곳도 안전하지 않아서 1839년 기해박해 때 이 마을 전교회장이던 최경환은 부인과 함께 순교한다.

최양업 신부(1821~1861)는 우리나라에서는 김대건 신부(1822~1846)에 이어 두 번째로 신부가 된 사람이다. 김대건신부가 '피의 순교자'였다면 최신부는 '땀의 증거자'로 알려질 만큼 12년 동안 이땅에 천주교를 널리 퍼뜨린다. 그러나 김신부보다 훨씬 더 많은 활동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그늘에 가려져 있다. 이 또한 최고, 최초, 최대를 좋아하는 우리네 1등주의의 병폐가 아닐까?

옛 천주교인들이 숨어살면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며 살았던 이곳 담배골에는 최성인의 유업을 기리는 성당과 노천 예배당과 묘소가 있다. 그리고 그윽한 골짜기답게 카페와 식당들이 무성하다. 아마도 담배 농사 짓던 그 밭들에 자리잡았을 것이다. 더구나 이 골짜기를 가로질러 도시순환고속도로가 지나기 때문에, 소리로만 친다면 번화가 한가운데 놓여 있는 듯하다.

최경환 성인의 묘소 앞 뽕나무는 우리에게 달디 단 오디를 선물하고 있다.

최성인과 최신부, 그리고 그 가족과 신앙인들이 겪은 슬픔이 너무 진해 오디의 검디검은 단맛으로 승화하였나 보다.

#지리적 정신적 배후

병목안 골짜기를 벗어나면 안양시의 중심이 되고 안양천 건너에는 관악산과 삼성산이 맑은 물을 또 안양천에 보태고 있다. 안양유원지로 이름 높은 곳이다. 광교산이 북쪽으로 뻗어 백운산, 청계산, 관악산을 차례로 만들어 놓고 관악 좌우에 삼성산과 우면산을 일으켜 세웠다. 이 산줄기는 한남정맥은 아니지만 한남정맥에 힘을 실어주면서 뒤를 든든하게 받치고 있는 배후이다.

이렇게 한남정맥에 뿌리를 둔 산줄기가 든든해서 그럴까? 안양유원지 근처에는 불교의 요람이라고 할만큼 절터가 많고 그 흔적도 많아 신라말 고려초는 물론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안양사, 삼성산 삼막사, 연주암, 중초사명 당간지주와 삼층탑, 안양유원지 주차장 뒤에 있는 마애종, 그리고 그 뒤의 이름 모르는 절터들까지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다. 경주 남산에 비견될 만한 불교 유적이다.

특히 중초사 터로 알려져 있는 절터의 당간지주와 마애종은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특별한 유적들이다. 지금은 제약회사 안마당에 서 있어서 그 일대가 옛 절터라는 것이 실감 나지 않지만, 당간지주의 우람한 자태로만 보아도 꽤나 큰 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이 당간지주에는 많은 글자가 새겨져 있어 조성 연대를 알 수 있는 등 여러 정보를 담고 있기에 더욱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명문을 풀이하여 보면, '흥덕왕 1년(826) 8월 6일에 중초사 동쪽에 있는 승악(僧岳)에서 돌 하나를 쪼개 둘을 얻었고, 28일에 작업을 시작하여 9월 1일에 옮겨왔으며 827년 2월 30일에 공사를 마쳤다' 고 하면서 조성 사업에 참여한 스님들의 이름과 역할들을 적었다. 이를 통해 당간지주 조성에 7개월 가까운 기간이 걸렸음을 알 수 있고, 명문을 남긴 것으로 볼 때 중요한 사찰의 하나로 인식하였음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제까지 알려진 대로 이 절터가 중초사 터였는지에 관한 것은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명문에 중초사 동쪽 승악에서 채석한 것으로 되어 있지 중초사라는 단정은 없기 때문이다. 이는 이 절이 중초사였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반영하기 때문에, '중초사 터 당간지주'라고 못 박는 것보다 '중초사명 당간지주'라고 표기해야 옳을 것이다. 그리고 이 절터에 관한 명칭도 '중초사 터'라고 못 박을 수는 없을 것이다. 명문에 조성 책임자로 여겨지는 절주통(節州統)은 황룡사(皇龍寺) 항창화상(恒昌和尙)이라고 써 있으므로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