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경기만의 요해처를 송두리째 거머쥐고 있는 곳이 강화도다. 교동도, 서검도, 말도, 불음도, 주문도, 석모도가 서해의 관문이라면 염하가 시작되는 동검도에서 김포해안을 마주보며 요해처 마다에 설치된 53돈대는 동양의 마지노선이다. 교동도의 고구리산성(古龜里山城)과 강화도를 옹위하는 문수산성이 기각지세를 이루며 강화도를 철옹성이 되게 하였으니 40년 항몽전의 버팀목, 강화도의 지리는 그래서 오늘도 5천년 살아 고동치는 우리의 역사를 일깨우고 있다.

강화도 서남단에 위치한 마리산은 우리나라 땅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남쪽의 한라산까지와 북쪽의 백두산까지의 거리가 같다. 곧 국토의 중심이다. 뿐만 아니라 마리산 정상에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개국시조인 단군(檀君)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쌓은 참성단(塹城壇)이 있다. 그래서 마리산 참성단은 민족의 성지이자 정신적 지주다.

동검도 해안에 서서 눈앞에 다가선 마리산의 웅장한 모습을 보며 잠시 명상삼매에 들어본다. 문득 지난 1993년 3월21일 경기도 역사연구회장으로서 연구회 발족을 기념하는 제1차 유적답사를 회원 50여명과 함께 참성단에서 가졌던 날이 어제의 일처럼 떠오른다.

이날 고유제(告由祭)에서 축문을 통해 “국조께서 보우하사 배달자손들은 5천년 유구한 국기의 터전을 베푸신 큰 뜻을 받들어 국운개척에 진력하여 국운은 바야흐로 사해에 진작되어 통일의 소망을 이룩하는 시점입니다…-이하생략-”라고 국조(國祖)에게 올렸던 그 생생한 기억을 더듬어 본다. 인공위성사진에도 부각된 마리산은 이래서 단군 국조의 홍익인간 정신이 서린 역사의 현장, 문화의 보고다.

한편 강화도는 한강, 임진강, 예성강의 출구로서 고려시대는 개경(송도)의 목젖이었고 조선시대는 한양(서울)의 인후였다.

강화도 해변은 조석의 간만차가 11m에 달하고 개펄이 섬 전체를 에워싸고 있어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는데 천험의 요새를 갖추고 있다. 개펄체험의 현장 교동도로 들어가던 날 직선거리의 교동섬을 바라보며 개펄을 피해서 뱃길을 돌려 40여분간 항해하던 모습에서 강화의 심한 조수간만을 실감했다.

이처럼 왕도와 직결된 천험의 요새 강화도의 지리는 해상관문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해 왔다. 고려 항몽전때도 조운(漕運)에 의하여 안전한 해상통로를 거쳐 수송되어오는 조세(租稅)의 수입을 변함없이 확보할 수가 있었으며, 한강과 임진강 및 예성강을 통하여 경기, 황해, 충청, 전라, 강원의 각 도와 교통을 하는데 매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와 같은 천혜의 자연에 더하여 강화도는 비옥한 평야가 많고 기후조차 온난하여 농사짓기에 적합할 뿐 아니라 일단 유사시에는 천연지형을 방패로 한 국토의 보장중지(保障重地)로서도 그 기능을 다했다.

국토의 5대 도서중의 하나로서 강화도가 갖고 있는 지리의 중요성은 이처럼 역사의 궤도를 결정짓는데 큰 몫을 담당했다. 다시 말해 국운의 흥망성쇠가 곧 강화의 역사와 직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3국의 첨예한 각축이 전개되었던 고구려, 백제, 신라시대에도 강화도는 국방의 요새였다. 고구려시대는 혈구군으로 해상교통의 거점으로 중요시 되었고 신라시대는 해구군, 혈구진으로 해상무역의 요충지로 또는 해적의 제압과 호족세력을 견제하는 서해안의 교두보였으며 강화도의 혈구진, 남양만의 당항성, 완도의 청해진 세곳을 대당무역의 3대관문 군사요충으로 삼았다. 후고구려를 세운 풍운아 궁예도 강화도의 혈구진을 장악함으로써 해상권을 제압한 군사요충으로 이곳의 지리를 십분 활용했다.

격동의 역사무대마다 강화해협의 격랑은 변화무쌍한 조석간만의 해조음처럼 민족의 함성으로 충만했다. 몽고침략에 줄기차게 항쟁하던 39년간의 문화유산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강화도에 도읍을 옮겨 축조된 고려성지와 성곽은 살아있는 역사의 숨결을 토해내는 문화유산으로 강화도의 시련과 고난을 상징하고 있다.

한편 병자호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강화도는 유사시 정부의 피란처이기도 했다. 강화도로 향하던 인조이하 조정대신이 청군에 의해 길이 차단되자 남한산성으로 발길을 돌렸던 사실, 이때 강화검찰사로서 호란을 피해 강화도로 들어가려는 빈궁, 왕족, 고관대작의 부녀자들을 안전하게 인도하라는 임무를 저버린 김경징이 12월 강추위 발을 동동 구르는 이들 부녀자들을 강화나루터 월곶땅에 내버린 채 자기가족만을 강화도로 피란시킨 권력의 횡포에서 지금도 강화개펄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해초를 ‘경징이풀’로 매도했던 역사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청군에 유린되어 강화해안을 붉게 물들인 부녀자들의 피울음의 원망, 경징아! 경징아! 경징이풀이 된 수난으로 얼룩진 도하(渡河)의 잔영을 역사에 묻고 훤히 뚫린 육지연결, 초지대교에서 이 시대의 또 다른 경기산하를 본다.

병자호란이후 효종(孝宗)은 강화도의 방비책으로 내·외 성곽과 문수산성의 축조, 12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