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산하, 백두대간 속리산에서 서북으로 길게 뻗어내린 한남정맥이 경기 서북부 해안지역을 품에 안고 남으로 충청도와 접경을 이루었고, 추가령으로부터 경기 동북부를 감싸듯 옹위한 한북정맥이 임진, 한탄강의 요새를 허리에 끼고 서해를 바라보며 강화도를 끌어안았다.

다시보는 경기산하 답사 여정이 발길을 돌려 한남정맥을 왼쪽으로 끼고 한강을 따라 북상(北上)하는 형세다.

산과 물의 불가분리, 그래서 산하(山河)라고 했는가?

오대산 우통수와 금강산에서 발원한 생명의 젖줄, 옹달샘의 물줄기가 경기산하 질펀한 산자락 곳곳을 누비며 남한강 북한강을 이루어 서쪽으로 낮은 지세에 따라 동북부지역을 관류하여 처처에 비옥한 터전을 이루었으니 경기산하야말로 풍요로운 자연을 어머니의 품으로 한 천혜의 낙토(樂土)다.

강원도 원주시 불온면을 흐르는 섬강(蟾江)과 충주에서 흘러 오는 달내천이 합류하면서 남한강이 시작되는 곳이 여주군 점동면이다. 수로교통의 길목,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역사현장이다. 이 곳에는 흥원창(興元倉)이 설치되어 북한강의 소양강창, 충주의 가흥창(可興倉)과 함께 삼국시대 이래 한강을 통한 남북통로 조운(漕運)의 요지였다.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더니…평구역 말을 갈아 흑수로 돌아드니 섬강이 어디메오 치악이 여기로다….” 송강(松江) 정철이 노래한 관동별곡(關東別曲)의 흑수는 여주의 풍류를 상징하는 영월루(迎月樓) 밑을 흐르는 여강(驪江)을 말한 것이고 섬강은 여주군과 경계를 이룬 강원도의 한강수계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사람살기 좋은 곳으로 대동강유역의 평양, 소양강에 접한 춘천과 남한강이 시작되는 여주 일원을 꼽았다. 이미 선사시대부터 여주땅은 농경의 최적지였음이 이곳 점동면 흔암리(欣岩里)의 유적으로 확인되었다. 1977년 서울대학교 박물관의 발굴조사로 확인된 집터와 반월형석도(농기구) 돌칼, 갈돌, 무늬없는 토기, 홍도를 비롯하여 탄화(炭火)된 보리, 조, 수수가 출토되어 청동기시대부터 농경문화의 진원지였음을 밝히고 있다.

“금강산 골짜기 늙은 소나무/솔잎에 맺힌 이슬 한 방울/바위에 떨어져 굴러 내려와/땅속으로 깊이 스며 들었네/긴 어둠 지나고/동녘이 밝아 올 때/가녀린 물줄기로 다시 태어나/백제의 여울되고/고구려의 개울되고/신라의 시냇물되어/남쪽으로 서쪽으로/몇 천년을 흘러 왔네.” 김광규 시인의 교향시 '한강'의 여운이 한강변 백제의 도읍지가 되어야 했고 고구려의 땅이 되었다가 신라의 통일기 한산주(漢山州)가 되어야 했던 경기산하를 대변하고 있다.

일찍이 고구려·백제·신라가 쟁패의 각축을 벌인 삼국시대, 한강을 차지한 세력이 성공했고 이곳을 잃은 세력이 패배했던 통일신라기 역사무대의 파노라마가 민족사의 이정표로 다가선다. 삼국시대 백제의 술천성(述川城)은 지금의 금사면 이포리였고 고구려의 남하정책으로 경기 일원이 고구려의 영토가 될 때 여주군은 골내근현(骨乃斤縣)이 되었다. 신라때는 천령군(川寧郡) 황효(黃驍)로 불리기도 했다.

여기서 골내근현에 설치된 골내근정(骨乃斤停)은 신라의 통일 이후 전국(全國)을 9주(州)로 재편할 때 한산주의 군사요충이 되었다. 이천지방의 남천정(南川停), 광주지방의 한산정(漢山停)과 함께 여주의 한강변 골내근정은 군사전략상 매우 중요시되었던 요충지로 이곳에는 전술상 필요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특수부대인 이동식군단의 주력부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2001년 1·2월호 경기문화재단 발행 '기전문화예술'에 연재한 '새로 쓰는 한산기(漢山記)' 현지 취재 때 현장을 답사한 기억이 새롭다. 답사에 동행하며 역사현장을 소상하게 밝혀준 여주군 향토사학자 이현구(李賢求)선생도 타계한지 2년, 여주군 능서면 신지리 북성산에 토성으로 남아있는 골내근정이 지금도 군부대가 주둔한 군사요충이 되었으니 정녕 역사현장에서 살아 숨쉬는 민족의 자존심, 분출하는 통일의 생명력이 아닐 수 없다. 어디 그 뿐인가 한강수로를 한눈에 조감하는 대신면 천서리의 파사성(婆娑城) 또한 한강의 요해처였음을 증언하고 있다. 이곳은 경기문화재단 부설 기전문화재연구원 주관으로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파사성 장대터에 서니 이포나루가 바로 눈아래 있다. 이포대교가 세워지기 전 80년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6·25의 전화, 일제강점기, 조선시대의 이포나루를 상상해 본다.

“석양의 산은 천층(千層)으로 붉은데/가을 강은 한 띠(帶)인 듯 푸르구나/출세하고 숨는 것은 짧은 나무토막을 따르고/신세는 부평초(浮萍草)에 부쳤네/허술한 촌백성의 가게(店)요/쓸쓸한 역리(驛吏)의 정(亭)이로세/멀리 바람에 날려오는 소리는 어느곳 피리인가/슬프고 원망스러워 차마 들을 수가 없구나.”

조선초기 당대의 문장가 최숙정(崔淑精)이 이포나루의 생활상을 노래한 대목이다.

당시 강변마을의 애환이 한눈에 잡히는 듯하다. 강물따라 흐르는 세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