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의 금사면 이포리와 대신면 천서리 간을 왕래하는 나루가 배나루, 배개나루, 천양(川寧) 나루 등으로도 부르는 이포(梨浦) 나루다. 여주, 이천, 곤지암 등지에서 양평을 가거나 서울 통행을 하려면 반드시 건너야 할 나루이므로 금사면 천양 일대는 상주인구가 1천명이 넘을 정도로 사람이 몰렸다. 조선시기에는 수참(水站)을 두어 참선(站船) 15척과 별도로 도선(渡船), 즉 나룻배를 두었다. 1991년 12월에 이포대교가 완공되기 전까지는 대형 조선(造船)으로 차량까지 실어나르던 나루이기도 하다. '택리지(擇里志)'의 저자 이중환(李重煥)이 “한 굽이 긴 강이 동남방에서 동북방으로 흘러들어 마을 앞에서 띠를 두른 듯한데 이곳이 강가에 제일 가는 이름난 마을이다. 주민들이 오로지 배로 장사하는 데 힘을 써서 농사에 대신하는 바, 그 이익이 농사하는 집보다 낫다”고 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일제 때는 인근 지역에 금광이 두 군데나 있어서 '금쟁이'들이 모여들었다. 금광 인부들만 200명이나 되었으니 시장터는 이들의 호주머니를 노리는 주막으로 성황을 누렸다. 사고가 빈번한 곳에는 민간신앙도 한몫 차지한다. 이포신당이 바로 그 센터로 삼신당(三神堂)이라고도 하며 서낭, 용왕, 산신도사의 삼위를 모셔두었다. 마을에서 주관하는 공식적인 제사는 3년마다 음력 2월경에 길일(吉日)을 받아 시행하는데 무녀와 박수를 불러 굿을 하고 이어 3일 동안 마을축제가 계속된다. '태종실록(太宗實錄)'(태종14년 윤9월4일)에 내시별감(內侍別監)을 보내 이포신(梨浦神)에게 제를 지냈다고 한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그 유래의 깊이를 알 수 있다.

한강 본류 연안의 주요 나루를 들면 상류로부터 차례로 영월(寧越)·영춘(永春)·단양(丹陽)·북진(北津, 또는 淸風對岸)·서창(西倉)·탄금대(彈琴臺)·목계(牧溪)·흥호(興湖)·흔암(欣岩)·우만(又晩)·여주(驪州)·이포(梨浦)·하자포(下柴浦)·양근(楊根)·우천(牛川) 등으로 15군데 중 흥호부터 하자포까지 6군데가 여주에 있으니 가히 나루의 고장이라 할 만하다. 이곳 말고도 여주 관내의 나루를 더 들면 부라우 나루(여주읍 단현리 부라우 마을), 호포 나루(또는 조포 나루, 여주읍 연양리 양촌마을), 이호 나루(강천면 이호리 배미 마을), 천남 나루(또는 사비 나루, 대신면 천남리 사비 마을), 양화 나루(또는 내양 나루, 능서면 내양리 양화동), 찬우물 나루(흥천면 상백리 찬우물), 상자포 나루(금사면 금사리 밭들·금새 마을) 등이 있다.

남한강 수로에서 단독 항행이 가능한 구간은 흥호 나루까지인데 소강할 때는 약 열흘이, 내려올 때는 약 사흘이 걸렸다고 한다. 큰배는 길이 20~30m 폭 5∼10m로 선적량이 벼 200~300섬이었으며 수량이 풍부한 곳에서만 운항하였기 때문에 남한강 본류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선적량이 벼 50~100섬 규모의 중소 선박들은 홍천강·섬강·달천 등의 주요 지류를 통과하여 일단 영춘에 정박하였고 일부는 영월 덕포까지 올라가 싣고 간 소금, 새우젓, 조기젓 등을 현지의 콩·팥·수수·보리·담배 등과 교환하였다. 이러한 배를 '바꿈배'라고 하였으며 주로 범선, 즉 돛단배였다. 운항시기는 대략 3월에서 11월까지이고 이중 가장 활발한 시기는 장마와 한여름을 전후한 4·5월과 9·10월이었다. 4·5월에 운항하는 배의 주요 선적물품은 소금이고 내려올 때는 전 해에 생산된 콩과 햇보리 등을 실었다. 여름이 지난 후에는 주로 새우젓이 운송되었다. 특히 새우젓은 음력 6월에 잡은 육젓을 최상품으로 취급하였다. 이 때에 싣고 내려오는 물품도 여름이 지나면 출하되는 각종 밭작물과 담배 등의 특용작물과 서울에서 소비가 시작되는 목재와 땔나무들이었다. 그래서 9·10월은 수운활동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시기다.

해방 이후 10년까지도 배가 다녀 한강은 여전히 수운기능을 하였지만 양주에서 원주간 중앙선 철도가 개통(1940년 4월1일)된 이후 이미 흥호 나루는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팔당댐 건설(1974년) 이후 이러한 배의 운항은 사라졌다. 영월에서 내려오는 떼배는 뚝섬까지 갔다. 앞뒤로 노를 하나씩 달아 운항하였는데 얕은 여울을 만나면 사공이 뒤에서 배를 조정하고 바닥이 닿으면 뱃골을 파서 길을 내었다고 한다. 장마 때는 물이 불어 이포 나루에서 뚝섬까지 하루면 닿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상과 같이 항행로 곳곳에는 나루가 설치되어 강을 건네주는 한편 운항하던 배들이 머물 수 있게 하였다. 한강의 역할이 중요한 것은 남한강과 북한강을 포함하여 동서를 잇는 긴 축의 강상 수로 때문이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들도 이 긴 수로를 이용하여 서울을 왕래하였다. 여유가 있는 집안에서는 친지간에 왕래가 쉽도록 강변 가까운 곳에 주거를 정하였다. 조선의 유명 사대부들의 집이 주로 강변 부근에 포진해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양반 뿐 아니라 상인들도 이 수로를 이용하기 위해 강변에 거처를 정하였다.

여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