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을 통과하는 길은 현재의 3번 국도에 해당하는 동남방향의 남북축과 42번 국도인 동북방향의 동서축으로 나뉜다.

간선로를 모두 합치면 이천이 육로로 중개하던 길은 사통팔달로 연결되어 있어 경기 동남부 지역의 중심을 이룬다. 이러한 상황을 잘 나타내는 것이 바로 과거 이천에 소재한 두 개의 역(驛), 즉 아천역(阿川驛)과 오천역(吾川驛)이다. 아천역은 서울, 광주로부터 와서 조령을 넘어 동래로 가는 길을 중개하였고, 오천역은 양지에서 이천을 거쳐 여주로 나갈 때 중개하던 역이다.

그런데 이 축이 다른 두 길이 형성된 배경을 보면 모두 남한강 수로와 관련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즉 서울에서 사방으로 흩어져 나갈 때 송파진을 건너 광주, 이천, 음죽, 가흥창을 지나는 동남대로는 양평, 여주를 지나는 남한강 수로와 충주에서 만난다. 용인, 양지에서 이천을 거쳐 여주로 가는 동서축의 길도 결국 여주의 나루를 만나기 위한 것이다.

이천을 통과하는 육로가 수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계속되는 한강의 결빙 때문이다. 강물이 얼어 수로가 막히면 남부지방에서 올라오는 물자와 여행객은 충주에서 동남대로를 타고 이천을 거쳐 서울로 가야하고, 이포나루나 조포나루와 같은 여주의 대표적인 나루에서 배를 이용하여 서울에 닿는 동남부지역의 유통구조 또한 이 때만은 수로를 포기하고 이천까지 와서 동남대로와 만나야 한다.

동남대로를 통한 소의 이동은 수로와는 관계없는 이 길의 독자적인 기능이다. 소는 선운(船運)이 불가능하고 험한 산길도 피해야 하는데 장호원~이천~광주로 연결되는 소의 이동길은 지름길이면서도 이 점을 충족시킨다. 그러므로 이천은 조선시대 내내 유동인구로 붐볐고 특히 한강이 결빙하는 겨울철에는 오히려 더욱 활기가 넘쳤다.

이천의 이와 같은 특징은 안성과 마찬가지로 주요 길목마다 서있는 석불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천시 갈산동의 석불입상(石佛立像)과 대포동의 석조여래입상(石造如來立像), 모가면 소고리의 마애삼존석불(磨崖三尊石佛), 마장면 장암리의 마애보살좌상(磨崖菩薩坐像)과 이평리의 석불입상, 장호원읍 어석리와 선읍리 및 설성면 자석리의 석불입상, 그리고 호법면 동산리의 마애여래상 등의 주된 신앙주체는 여행객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양반 사대부들의 가거지(可居地)로서 이천은 부적절한 곳이었는데 그 이유는 수로와 직접 닿지 않고 따라서 서울까지 하룻길이 넘는다는 점 때문이었다. 1418년에 죄를 지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이천 대월면 군량리 부근으로 귀양을 갔는데 1436년에 아우인 세종 임금이 그를 과천으로 옮겨준 것은 양녕의 장인인 김한로(金漢老)가 이천과 가까운 죽산에 살면서 문제를 일으킨 데다가 서울까지 길이 멀어 각종 왕실행사에 참여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양녕이 죽산의 장인 집에 가기 위해 양화천을 건널 때 군(君)을 위해 놓은 교량(橋梁)이라는 의미의 '군량(君梁)'이란 명칭의 흔적이 마을이름으로 내려오고 있다. 읍지(邑誌)에 이천 풍속을 '거민피잔무토호(居民疲殘無土豪)', 즉 백성들은 지쳐있고 토호는 없다고 하였는데 이는 바로 과거 이천의 상황을 적시한 표현이다.

반면 여주는 '사상유아민무가색(士尙儒雅民務稼穡)', 즉 사대부들은 선비의 우아함을 숭상하고 백성들은 농사에 힘쓴다고 하여 이천과 대조된다. 흔히 여리(麗利·또는 呂利)로 표현되는 여주와 이천은 결국 풍속의 유사성이 아니라 지리적 연결성과 토질의 동질성으로 묶여진 말인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하영(禹夏永·1741~1812)은 '천일록(千一錄)'에서 여주·이천지방은 토질이 좋아 보리추수가 끝난 밭에서는 사탕수수와 들깨 등 다양한 품종을 재배하고 '여리전상조도개기토성최의고야(呂利專尙早稻盖其土性最宜故也)', 즉 논의 토질은 이른 벼를 심기에 알맞아 주민들도 전적으로 이른 벼를 심으려 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곧 벼 수염에서 자줏빛이 난다는 자채쌀(紫彩米)이다.

사탕수수와 자채쌀이 이천의 질 좋은 토양에서 비롯된 것이듯 이 고장의 대표적인 민속놀이인 거북놀이 역시 이러한 조건들을 고려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는 풍속이다.

이천 중에서도 단월동이 원조라고 하는 거북놀이는 8월 보름, 즉 추석날 낮에 15~16세 된 동네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이맘때쯤 익는 수수깡 잎을 맷방석에 끼워 크고 작은 거북을 만들면서 시작된다.

큰 것 두 개는 어미 거북과 아비 거북이고 작은 것들은 새끼거북이다. 저녁이 되어 어둑해지면 이들은 거북으로 몸을 가리고 비교적 여유가 있는 집들을 찾아다니며 덕담을 건네며 바가지에 떡 등 먹을 것을 얻는다. 순례가 끝나면 동네 사랑채를 빌려 얻은 떡들을 나누어 먹는다. 물론 떡은 자채쌀로 만든 것이다.

추석차례에 올릴 소량의 햅쌀을 얻기 위해 조그만 땅뙈기에 조생벼를 심는 여타 지방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8월 보름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