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남을 대표하는 슬로건은 '청정 하남'이다. 그것은 도심을 벗어나자마자 곧 만나게 되는 풍부한 자연녹지가 잘 말해주고 있다. 즉 하남시는 전체면적의 98.4%가 개발제한구역(일명 그린벨트)이다.

이는 경기도에서 의왕시와 더불어 최고의 수치를 자랑한다. 한강의 상수원 보호구역과 연결되는 개발규제는 1970년대 지정되어 지금에 이르는 동안 자연녹지 공간을 확보한 하남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그러나 하남시에 가 보면 청정 하남이 체감되지 않는다.
 
하남시 행정지도를 보고 있노라면 한강을 우비 삼아 서울 쪽을 바라보고 서 있는 '우비 삼남매'의 누구를 닮아있다. 중부고속도로와 구리~판교간 고속도로는 '入'자 모양으로 펄럭이는 넥타이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풍산동이 머리쯤 되고 신장동과 덕풍동은 가장 중요한 목덜미에 해당하는 셈이다.
 
13만명이 채 안 되는 하남의 전체 인구 가운데 덕풍동(1·2·3동)과 신장동(1·2동) 및 풍산동에 10만명이 집중되어 살고 있다. 하남시 전체 면적 4분의 1에 불과한 이 지역에 전체 인구 80%가 몰려 사는 형국이다. 하남의 초·중·고등학교 21개 가운데 5개를 제외한 16개 학교가 이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하남의 사람들과 중요한 시설들이 이 곳에 집중되어 있어 마치 목을 조이고 있는 형국이다. 도로를 넓히거나 공공기반시설을 확충하고자 해도 개발제한구역으로 인해 시유지를 다시 시가 구입하는 형식이어서 예산 활용이 여의치 못한 것도 사실이다.
 
숨이 막힌 우비소년 하남의 비명소리가 들리는 듯 하지만 정부의 대답은 간단하다. “기다려∼ 봐!” 한편으로 풍요로운 녹지는 급격한 개발에서 얻는 편리함보다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이 보다 가치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머지 않은 뒷날 맑고 깨끗한 하남을 부러워하는 이웃의 선망을 보고 싶을 따름이다.

#하남의 진산, 검단산
 
그러한 하남의 싱그러움 중심에는 진산 검단산(657m)이 자리잡고 있다. 남쪽으로 남한산성의 남한산, 즉 청량산과 동쪽으로 검단산, 북쪽으로 한강을 이고 있는 하남은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검단산은 하남의 진산으로 서울 인근의 북한산·도봉산·관악산의 이름에 가려 있다가 하남시의 발전에 따라 그 진가가 제대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백제 이래로 한강 남쪽을 지키는 관문의 역할로 검단산은 역사 속에 우뚝하게 존재해 왔다.
 
창모루, 즉 창우동에서 검단산을 향해 가고 있다. 유길준(兪吉濬·1856∼1914)) 선생 묘를 찾아가는 길이다. 새로 뚫린 길을 따라가다 보면 새롭게 조성된 우뚝한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호기심 어린 마음으로 가서 보니 현충탑인데 아마도 경기도 땅에서 가장 큰 인물 조각상이 아닐까 한다.

호국사라는 사찰이 있고, 검단산 입구에 새롭게 조성을 끝낸 베트남참전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곳 하남 검단산에 조성된 이유는 알 수 없다. 호국사~현충탑~베트남참전기념비로 이어지는 사유의 확장이 자못 근대사의 참람했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셈인가?
 
차라리 그 자리에 조그맣게라도 '유길준을 테마로 하는 공원'을 만들어 하남을 특화하는 랜드마크적인 상징을 부여했더라면…그런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인가? 어쩌면 가나안농군학교를 일궜던 김용기 선생의 삶이 하남의 가치를 더 높일 수 있는 것을….
 
창우리에서 검단산을 오르는 능선의 가장 빠른 등산로 입구에는 '엄마사랑' 화장실이 서 있다. 얼마 전 유명을 달리한 유병덕(유길준의 후손) 옹이 기증한 땅이다. 기계 유씨가 여전히 하남의 유지로 건재할 수 있는 이유를 알 만하다.

 
#근대 하남의 인물 유길준
 
유길준 선생의 묘는 검단산 능선의 가파른 경사지에 위치해 있다. 원래 덕풍동 동부초등학교 뒤에 있었던 선생의 묘는 그 곳이 택지로 개발됨에 따라 현재의 자리로 이장한 것이다. 아들 유만겸·유억겸 선생의 묘도 함께 위치해 있다.
 
유길준은 여러 면에서 최초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는 근대의 대표적 인물이다. 조선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자,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었다. 서양 문물을 접하면서 느꼈던 충격과 부러움을 비장한 각오로 기록한 책이 '서유견문(西遊見聞)'이니, 최초의 국한문 혼용체 저술이요,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서양 문물 소개서이기도 하다.
 
'처음'이 주는 의미는 약간의 긴장과 설렘을 동반하는 즐거움이다. 또한 그것은 확실하지 못한데서 오는 엉거주춤과 오해와 오래된 전통과의 갈등을 동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유길준과 그의 시대가 보여준 당대 지식인의 삶이 또한 그러하였다. 그러나 적어도 1914년 그의 죽음 이전까지 국제정세에 대한 인식에서 유길준을 능가할 인물은 조선에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검단산에는 한국경제계의 족적을 남긴 정주영 회장 묘역이 있다. 검단산의 줄맥을 잇는 창우리 뒷산에는 넓은 인공수림의 묘역이 갖추어져 있는데 바로 현대그룹을 일군 정주영 회장을 비롯한 부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