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실서원 터에 서서
토평 인터체인지에서 한강을 따라 춘천 가는 길에 옛 평구역 못 미처 미음나루가 있는 수석동에는 석실서원(石室書院)이 있었다. 지금은 빈터에 조그만 표석하나 덩그러이 놓여진 이곳이 충청도 화양서원과 더불어 노론의 튼실한 근거지였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표징은 보이지 않는다. 길가의 숱한 음식점 안내 표지판이 넘쳐나도 석실서원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없다는 점이다. 겸재 정선의 그림이나 당대 석학들의 일기와 시에서 자주 등장하던 미호(渼湖)와 그 석실이 바로 이곳이고, 석실을 빼고 조선후기 사상사를 이야기 할 수 없음에도 그러하니 빈터에서 바라보는 한강의 유장한 흐름만이 하릴없이 억겁을 흐를 뿐이다.
병자호란 당시 척화를 주장했던 청음 김상헌과 강화 남문에서 화약에 불을 지르고 자결한 선원 김상용 형제를 모신 석실서원은 이후 김창협·김창흡·김원행으로 이어지는 안동 김문의 정치 사상적 근거지였다. 특히 기호학파의 유명한 호락논쟁에서 낙론을 대표하던 곳이기도 하다. 김원행이 석실서원 아래쪽 지금은 기파랑재라는 음식점이 있는 어간에 ‘삼주삼산각’이라는 서재에서 담헌 홍대용, 이재 황윤석 등을 제접할 때 석실서원은 가장 빛이 나는 때이기도 하였다.
석실의 영화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끝이 났는데, 기호 노론의 근거지 역할을 했던 석실서원의 훼철은 대원군의 목표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더욱이 일제 강점기 금곡에 있던 조말생 묘역이 홍유릉이 조성됨에 따라 이 곳으로 이장되면서 석실서원 터는 더욱 궁색한 것이 되어 잊혀져 버렸다. 현재 석실서원을 복원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지만, 양주 조씨 묘역과 재실 영모재와 맞닿아 있는 석실서원을 어떻게 설명하란 말인가?
◈밖에서 찾는 것들의 위약함에 대하여
숙종·영조·정조시대를 조선후기 르네상스라 일컬으며 소위 ‘진경(眞景)시대’라 운위하고 있다. 실상 이는 동아시아의 보편적 역사적 흐름이었지 조선만의 독창적인 현상은 아니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동양 3국은 각각 전쟁복구기를 거쳐 200여년간의 평화시기를 열어 자문화에 대한 재발견을 하고 있었다.
특히 조선의 경우 망해버린 명나라에 대한 의리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명백한 힘의 실체인 청나라를 오랑캐라 여기며 북벌을 가슴속에 키우며 조선 중화주의를 천명하고 있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청나라는 강희대전과 사고전서 등이 편찬되며 고증학을 꽃피웠던 시기이고 일본의 경우 오사카를 비롯한 대도회지를 중심으로 상공업의 발전이 괄목상대했던 시기였다.
그렇게 자문화에 대한 재인식 과정에서 점차 연경을 다녀온 노론의 젊은층은 북벌론의 허구성을 인식하고 청나라에서 배워야 한다는 북학론을 주창하기에 이른다. 이른바 북학론의 대두가 그것이다. 북벌(北伐)과 北學(북학), 얼마나 큰 사상적 전변인가?
당시 노론의 대다수가 청나라에 대한 박물학적 관심에 그치고 있다는 점에서 북학파들이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직시하고 주자성리학을 반성하는 기반 위에서 북학론을 경제지학(經濟之學)의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근기 남인 실학자들과 일맥상통함을 읽는다.
그러나 ‘북학사상’이 ‘개화사상’으로 연결되고 그것이 다시 지금 ‘세계화’로 연결되어 실제적 맥락이 사상된 채 아직도 밖에서 배워야 하는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 자신의 내적인 힘과 의미를 잃어버린 채 그것을 밖에서만 찾은 지 200여년. 밖에서 배워오자는 슬로건을 내건 지 그만한 세월이 흘렀으면 이제 그들을 가르쳐야 할 때가 된 것이 아닌가.
19세기 조선정국을 주도한 남공철과 김정희에 이르러 북학론이 실천적인 학술체계로 정립되지 못하고 청대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학문에 대한 관심과 미시적인 분야에 대한 관심에 머무는 정도에 머물렀다는 점은 지금과 무엇이 다른가.
북학을 실천으로 옮긴 시기를 살았던 추사(秋史) 김정희가 청나라의 완원을 따라 배우고자 한다는 의미에서 호를 완당(玩堂)으로 바꿀 때, 혹은 하와이를 지나며 아름다운 섬에 반해 호를 도산(島山)으로 했던 안창호의 시각에서 사상적 유사성과 위약성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작금의 세계화를 노래 부르며 영어를 공용화해야 한다는 자들의 생각과 무엇이 다른가?
자존(自存)은 밖에서 구해지지 않는 법이다.
◈다산을 찾아서
조선후기 명성과 영화를 누리던 석실에서 한 참 정도의 거리에 마재가 있다. 마재에는 다산 정약용 생가가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다산이 지척에 있는 석실을 운위한 적이 없고, 역시 석실을 드나들던 그들도 다산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조선 후기 조선의 고통스런 단면이었다. 독점된 권력의 우악스러움과 소용되지 못한 채 찻잔 속의 폭풍으로 끝나 버린 개혁의 꿈.
소위 교육받은 자들 가운데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
남양주·구리(4)- '개혁의 꿈' 서린 곳
입력 2003-07-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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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7-29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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