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유역의 상징적 고구려 유적인 아차성(阿且城)에 경기산하 답사팀의 발길이 닿은 것은 지난 7월8일이다. 이날은 유난히 쾌청한 날씨였다. 누구보다 날씨에 가슴졸여야 했던 조형기 기자의 카메라가 쉴새없이 작동하며 시야에 조망되는 한강유역 구리산하를 담고 있다.

동쪽으로 한강의 물줄기가 하남시 검단산 협곡을 지나 미사리 모퉁이를 돌아 구리시 한강연안 일원을 오른편으로 느긋하게 껴안으며 아차성 요새의 절벽을 휘감으면서 서쪽으로 흘러 서울 도심을 관통하고 있다. 동서남북이 한눈에 잡히는 곳이다.

양평, 남양주, 하남, 남한산성, 몽촌토성, 풍납토성 송파일대와 남산을 중심으로 한 서울의 도심이 손에 잡힐 듯 하고 아차산 등줄기를 경계로 한 서울시 광장구, 중랑구, 노원구 일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서북으로 도봉산, 북한산, 북악산이 도성의 북방을 수호하듯 둘러있고 관악산 청계산이 남쪽으로 버티어 있다. 아차산성, 과연 천하의 한강요충 관방중지(關防重地)임을 웅변하듯 이 곳 산성에서 이어진 성벽은 구불구불 등줄기에 이어져 망우리 고개에 이른다.

아차산 능선 남쪽과 동구릉 산자락이 구리시 일원이다. 그야말로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강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일 때 구리시 산하는 한강연안의 요충지로 관방의 역할을 했음이 아차산 성벽으로 설명되고 있다. 아차성에서 지호지척에 있는 하남 위례성에 백제가 1세기 무렵 도읍하면서 한강은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무대가 된다. 한강유역은 한반도에서 노른자위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 곳을 차지하는 정치세력이 역사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백제가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국운의 융성기를 맞을 때는 그 세력을 북으로 확대, 고구려의 평양까지 공격하는 형세였다. 그러나 5세기 무렵 고구려는 광개토왕, 장수왕의 전성기를 맞아 한강유역에 손을 뻗쳤다. 이후 삼국이 서로 겨루면서 한강유역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쟁탈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6세기 중반 신라의 진흥왕이 이 지역을 차지하고 그 기반위에서 삼국을 통일하기전의 고구려 전성시대 판도를 보면 죽령, 조령, 괴산, 진천, 화성의 남양만 당항성이 고구려 영토였고 백제는 천안 이남의 충청, 전라도, 신라는 낙동강 유역의 경상도 일원이 영역이었다.

그후 다시 신라의 전성기때는 경기도, 강원도, 함경도, 경상도 일원이 신라의 수중에 있었다. 이때 경기산하 중심축은 남한산성이 있는 한성(漢城)이었고 한강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는 구리시의 아차성이 호형호제의 요충이었다. 이 때의 서해안 당항성은 선진문화국 중국과 직결할 수 있는 바다의 루트, 대 중국 교통의 요지였으니 경기도를 아우르는 서해안의 물줄기 한강의 여울목이 구리시 아차산 자락이었다.

이처럼 고구려의 전성기였던 5세기 무렵 아차산성은 동북아시아의 최강자였던 고구려의 최남단 전초기지가 있었던 관방요새였다. 1997~2001 발굴조사에서 온돌시설이 있는 건물터가 밝혀졌고 고구려 중기의 대표적인 토기류들이 출토되었으며 화살촉과 도끼를 비롯한 많은 양의 철기류들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출토유물 이외에 유적 내부에서 5~6세기의 고구려 유물 이외에는 출토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차산 일원의 성벽유적과 보루는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점령하기 위한 군사 전초기지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쯤에서 필자는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일원과 조령의 서쪽과 죽령의 북쪽을 되찾으려는 실지회복의 웅지를 불태우며 원정군의 총수로 자원출정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 곳 아차성에서 전사한 고구려장군 온달(溫達)의 일화를 외면할 수 없다.

'삼국사기' 열전 온달편이다. 590년이었다. 영양왕이 즉위함에 이르러 온달은 왕에게 아뢰기를 “신라는 우리 한북(漢北)의 땅을 갈라 빼앗아 군(郡), 현(縣)으로 만들었으므로 백성들은 원통함에 싸여 아직 부모의 나라를 잊어버리지 않고 있사오니 원컨대 대왕께서 신을 어리석고 불초하다 마시고 군사를 내어주시면 한번 나가 싸워 우리의 땅을 회복하겠나이다.” 하니 왕은 이를 허락하였다.

온달은 군사를 거느리고 떠날 때 맹세하기를 “내 계립현(鷄立峴-지금의 문경)과 죽령(竹嶺-경상~충청 도계(道界))의 서쪽땅을 우리땅으로 돌리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하고 출정하여 드디어는 신라군과 아차성(阿且城-서울시 광장동 광장리산성(廣壯里山城)) 밑에서 싸우다가 적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이에 그를 장사 지내고자 하는데 영구(靈柩)가 땅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으므로 공주(公主)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이미 결판이 났사오니 마음놓고 돌아가시오” 하자 비로소 관이 움직여서 드디어 장사를 지냈는데 왕은 이 말을 듣고 크게 통곡하였다.

영양왕 그는 누구인가? 선왕인 장수왕(長壽王)이 평양으로 천도하며 남진책의 터전으로 마련한 조령, 죽령 이북의 땅을 신라에게 빼앗긴 것을 분통스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