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평의 지리적 특성은 산 아니면 물, 말 그대로 산하이다. 경기 최고봉을 자랑하는 화악산(해발 1천468m)을 필두로 촉대봉, 국망봉, 명지산, 연인산 등 1천m가 넘는 산들과 운악산, 주금산, 축령산 등 800~900m에 이르는 산들이 즐비하다. 그러다 보니까 가평천과 조종천 등이 북한강의 수량을 늘려주고 있다.
가평천과 조종천은 군의 동·서를 각각 맡아 흐르고 있는데 이는 명지산, 연인산, 매봉 등의 연봉이 군의 중심을 북에서 남으로 관통하기 때문이다. 외곽은 외곽대로 높은 산들이 줄지어 있고, 중심은 중심대로 산맥이 흐르니 샛강이 발전할 수 밖에. 게다가 지리적 특성 때문에 샛강 따라 길을 내었으므로 가평은 온통 산 아니면 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조종천 바위의 암각 글씨들
그 중 조종천은 100여리에 걸쳐 굽이굽이 흘러내린다. 청평댐 아래에서 조종천을 따라 거슬러 오르다 보면 상면을 지나 하면 소재지에 이른다. 하면이라는 행정 용어보다도 현리(縣里)라는 한 마을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곳이다.
상면과 하면 일대는 조선 초기까지 조종현이었는데 그 관아가 있었던 곳이어서 현리라고 하고 현청이 있었던 위치는 지금의 하면사무소 자리라고 한다. 그러나 '조종'이라는 이 지역 현 이름은 학교와 우체국 등의 이름에서나 겨우 남아 있다.
조종(朝宗)이란 말은 본래, '옛날 중국에서 제후가 천자를 봄과 여름에 찾아뵙던 일'과 '강물이 바다로 흘러 들어감'을 비유하여 이르던 말이다. 조선 초기까지의 옛날 조종현의 '조종'은 그렇다면 후자를 일컬었을 터였다. 그러나 말이 씨가 된다고 하였던가. '조종'이라는 지명에 걸맞게, 또 전자에도 꼭 들어맞게 되는 일이 생긴다.
숙종10년(1684) 명나라가 청나라에 의해 망한 지 22년 되던 해이다. 허격(許格), 백해명(白海明) 등이 명나라 의종황제의 친필 '사무사(思無邪)'를 구해와 가평군수 이제두(李齊杜)와 함께 조종천 옆 바위에 새긴다. '생각에 삿됨이 없다'는 글로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 한 것이다.
이에 앞서 이 주변은 청에 대항하여 반혁명을 기도하다가 조선으로 귀화한 9명의 명나라 의사가 정착한 곳이기도 하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지원병을 보내준 명나라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조선의 의리와 명나라 반청 인사들의 배청 감정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선조의 친손인 낭선군(郞善君)이 '조종암(朝宗巖)'이라고 쓴 글씨까지 새겨 넣으니 '조종'이란 두 의미가 모두 부합되게 된다. 게다가 선조의 친필 '재조번방'이 큰 글씨로 새겨져 있는데 옆에 있는 '만절필동'까지 합하면 '만절필동재조번방(萬折必東再造蕃邦-만 번 꺾여도 반드시 동으로 와서 우리를 다시 살려 주었네)이 된다.
만절필동은 명나라 신종황제의 글씨로 허격이 새긴 것이니 이 바위 글씨는 명나라 황제와 조선 국왕의 합작품이라 할 것이다. 또, 효종이 우암 송시열에게 내린,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먼데 지극한 아픔이 마음 속에 있네'라는 '일모도원지통재심(日暮道遠至痛在心)'을 송시열의 글씨체로 새겼다. 그리고 '조종암보존회'가 조직되어 '조종암문헌록'을 펴내는 등 숭명배청론자들이 정신적 지주로 삼는 장소가 된다.
숙종 30년(1704), 창덕궁 후원 임금 전용 얼음 창고인 내빙고 터에 대보단(大報壇)을 설치한다. 현재의 지배자인 청나라에 불복하면서 대명의리를 내세우겠다는 의지였다. 그래서 이 곳 조종암도 대보단이라고 부르고 마을 이름도 대보리가 된다. 양반끼리 인사를 나누다가 이 곳 출신의 '조종계출'이니 '대보계출'이니 하면, 상대방이 갓을 벗고 담뱃대까지 뒤로 돌리며 예우를 하였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로 '의리지향'이 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조종천이 활처럼 휘어 돌아가는 천변 산자락에 커다란 바위들이 중첩되어 있다. 바위면의 적당한 곳을 가려 문장들을 새겼는데 아직은 비교적 알아보기 쉽다. 다만, 순조 4년(1804)에 세운 기실비는 총탄 자국으로 인하여 또 다른 아픔을 각인시키고 있다.
조종암에 오르다 보면 오른쪽 큰 바위에 '견심정(見心亭)'이라는 각자가 보인다. 조선말의 대 철학자이자 경기지역의 구심점이었던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선생이 정자를 지으려던 바위에 그의 제자인 유중교 의병장이 새긴 것이다. 바위는 옆에서 보기에 꼭 배처럼 생겨서 금방이라도 조종천을 타고 바다로 항해할 것만 같은데 그 누가 조종천에 뜰 저 돌배를 조종하려는지.
조종암은 모화사상에 찌든 우리 선조들의 슬프고도 순진한 자화상일지 모른다. 그러나 사대하지 않는 것처럼, 또 주권국가인 것처럼 행동하면서 실제로는 사대하고 있는 오늘의 비 주권국가 현실이 극명하게 대비된다. 그래서 조종암은 우리에게 또 다른 교훈을 주고 있다. '사대주의의 극치라고 섣불리 말하지 말라'는….
#온몸으로 느끼는 현등사의 여름
현리에서 조종천을 거슬러 시오리쯤 오르면
가평(2)-조종암의 교훈과 현등사에서 늦여름
입력 2003-09-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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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9-15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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