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평야에 연해있는 일부 땅을 제외하면 북한강 하안(河岸)은 경사각이 30~50%에 이르는 가파른 산록을 이룬다. 춘천에서 소양강과 합류하여 깊은 산골을 메우면서 흘러온 북한강은 동쪽으로 홍천강을 만나 크게 사행(蛇行)하다가 조종천(또는 청평천)을 받아들인 후로는 곧게 남하하여 남한강과 만난다.

그래서 청평댐으로 수로가 막히기 이전에도 이 곳은 다음과 같은 크고 작은 많은 나루들을 거점 삼아 어디가나 호경(湖景)을 만끽할 수 있었다. 외서면 대성리 관터마을과 삼회리 아랫퇴주, 외서면 오대골과 설악면 회곡리 가래골, 외서면 호명리 범울이, 외서면 고성리 양진·자잠·방터·고재, 설악면 사룡리 용문내와 선촌리 어리실, 설악면 송산리 소리와 미사리 황골·미사·물미, 가평읍 복장리 검단·복장포와 금대리 비령대, 가평읍 달전리 안반지 등.

과거에는 나루가 시장 기능까지 겸하였기 때문에 이를 반영하듯 가평 관내에 장시는 읍내장과 현리장 두 군데 밖에 없었다. 다른 고을에 비하면 절반 수준이다. 현리(縣里)는 일찍이 폐현(廢縣)된 조종현의 읍치다. 가평이 큰 고을이 아님은 면 구성이 방위면(方位面) 체제인 점에서도 나타난다.

그 중 동면(東面)이 없는 것은 고을 중심인 가평읍이 강을 끼고 동쪽으로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한말에 이르러 청평장이 생기고 일제때 북면에 목동장이 생겨 장이 네 개로 늘어났지만 나중에 생긴 두 곳은 휴시(休市)하는 일이 잦았다. 해방 후에는 목동장이 없어지고 설악장이 생겼다.

1937년 양수교의 건설, 1939년 중앙선 철도의 개통, 1940년 청량리에서 양평까지의 철도 개통 등은 이 일대 나루는 물론 지역경제 전체에 커다란 변화를 준 사건들이다.

1925년의 을축년 대홍수를 계기로 시작된 한강상류에서의 댐 건설은 화천댐(1939~1944)과 청평댐(1939~1943)의 완공을 보았고 해방 후에는 팔당댐이 1968년 5월에 착공하여 1974년 5월에 준공되었는데, 이러한 댐 건설 역시 수운의 단절을 가져와 이에 의존해 온 이 일대 주민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댐 건설로 한강 본류까지 배의 운항이 불가능해졌지만 1970년대 초반까지 북한강 본류와 홍천강을 통하여 청평댐 바로 전 오대골을 종점으로 여전히 장작과 뗏목이 내려왔는데, 그것은 이를 서울까지 기차 화물로 수송할 수 있도록 경춘선에서 오대골까지 별도의 철로가 연장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원도에서 강을 타고 내려온 뗏목과 장작이 오대골 선착장에 도착하면 기계장비로 이를 끌어올려 빈터에 쌓아놓았다가 화물칸으로 옮겼다. 이 철로는 1973년경 철거되었다고 한다.

한편 1960년대 말에 동력장치가 달린 '똑댁이' 배가 신종 교통수단으로 등장하면서 노 젓는 나룻배는 대부분 도태되었고 곳곳의 나루터는 새 여객선의 선착장이 되었다. 그러나 농민들은 주로 쌀, 콩, 팥 등의 곡류를 장날에 내다 팔기 위해 이를 이용하는 정도였고 학생들은 대부분 읍내에 거처를 두었으므로 주말에만 승선하는 등 이용객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운행횟수도 청평과 가평 달전, 그리고 홍천 마곡 간을 각각 하루 1~2회 정도 왕복하는 수준이었다. 1978년에 페리호가 등장한 것은 여객선 이용도가 높아져서가 아니라 도로 여건이 좋아져 오히려 여행객이 줄자 그 목표를 유람선 기능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현재 북한강과 홍천강을 운항하는 선박은 오대골에서 출발하는 유람선 한 척이 유일하다.

대중의 인식은 일개 마을 이름에 불과한 외서면 청평과 고을 이름인 가평을 대등하게 여기는데, 그 이유는 단순히 같은 '평'자 돌림이라서가 아니라 두 곳 모두 교통중심지로서 대등한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청평은 강상교통의 요지인데다가 멀리 장호원에서부터 여주·양평을 이어 포천까지 올라가는 37번 도로가 46번 춘천가도와 만나는 지점이다.

청평에서 가평까지는 엄고개(奄峙)와 빗고개(梳峴 또는 色峴)를 넘은 다음에 중종 태실이 있는 태봉(胎峰)을 지나 달전천(甘泉)을 따라 내려가는데, 길 왼쪽 편에 위치한 대곡리에서부터 가평의 내륙을 서쪽으로 가로질러 가본다.

대곡리는 성리학에 기초를 두고 서양 천체관의 영향을 받아 '역학도해(易學圖解)'라는 저서를 통해 독자적인 지전설(地轉說)을 주장한 청풍 김씨 김석문(金錫文·1658∼1735)이 살았던 곳이다. 그는 마을 이름 대곡(大谷)을 따서 자호(自號)로 삼았다. 그의 지전설은 과학적인 천문관측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낮게 평가되고 있지만 그보다는 그가 이를 통해 중국 중심의 역사관과 세계관의 탈피를 선구적으로 모색했다는 점에다 더 큰 점수를 주어야 할 것이다.

대곡이 살았던 대곡리에서 하색리로 내려오다 보면 어우(於于) 유몽인(柳夢寅·1559~1623)의 묘가 있다. 현지에는 팻말도 없고 심지어는 그의 묘가 있는지 조차 알려지지 않아 답사팀도 찾는데 애를 먹었다. 혹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 하색리 '이방실장군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