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의 중심 반월성에 올라=포천 땅의 생김새는 남북 방향으로 길다. 그것도 유난히 길어서 100리가 훨씬 넘는다. 가평군과 맞닿은 동쪽 경계는 산줄기로 이어져 있고 동쪽에서 서남쪽으로 흘러간다. 이 산줄기의 대부분은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온 한북정맥이다. 즉 이 정맥을 분수령으로 하여 한강수계와 한탄강수계로 나뉘는 것이다. 포천은 한강수계인 소흘읍의 일부와 내촌면을 빼고는 모두 한탄강수계에 속해 있다.
포천의 동쪽 운악산은 가평 쪽에 현등사를 거느리고 있어 현등산으로 불리고도 있지만, 절반 가량은 포천 몫이다. 서남쪽으로 내려온 한북정맥은 운악산 다음으로 수원산(水源山)을 만들어 놓고 한 줄기를 북서방향으로 진행시킨다. 그 줄기 끝에 또아리를 틀고 앉은 것이 구읍리 청성산(일명 반월산)의 반월성이다. '군내면 구읍리'라는 땅 이름이 말해주듯 이 곳에는 조선시대 포천현의 치소(治所)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백제, 고구려, 신라가 차례로 이용하고 고려, 조선까지 활용한 것을 보면 반월성을 포천의 중심으로 봐야 할 것이다. 사방을 조망하기 좋아서 대피용 산성으로 적합하였을 텐데 이는 산성에 올라 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다. 아래를 굽어보는 시원함과 사방의 형편을 낱낱이 볼 수 있는 지세가 놀라울 뿐이다. 아니, 그런 장소를 골라 성을 쌓고 중심지로 삼은 안목에 박수를 보내게 된다.
출토 유물들로 보아 5세기 후반까지는 백제, 6세기 중반까지는 고구려, 그 이후에는 신라에 의해 다스려졌던 것으로 보더라도 삼국이 이 성을 중요한 군사적 기지로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백두대간에서 뻗어 내린 한북정맥의 한 맥에 자리잡아 작게는 한북정맥을, 크게는 백두대간을 감시하고 경영하기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대동여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북쪽의 독현(禿峴)봉수와 남쪽의 잉현(芿峴)봉수는 반월성의 위상을 더욱 높이고 있다.
남북으로 길고도 좁게 평야가 이어진 곳, 포천의 중심에 있는 반월산은 북으로는 철원 일대, 남으로는 의정부와 퇴계원 일대까지 섭렵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해서, 산과 들을 모두 경영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
◆북방계 미인형의 불상=반월성에서 서쪽으로 포천천과 포천 시가지를 건너 바라보이는 산이 왕방산(王方山)이다. 왕방산 너머는 동두천의 중심이 되니 포천과 동두천은 같은 위도 상에 중심을 두고 있다. 왕방산 남쪽 기슭 어룡리 석조 여래입상을 찾아간다. 하나의 자연석으로 배 모양의 광배와 불상을 조성하였는데 그 소박함이 가슴깊이 전달된다. 우선 광배의 모양이 정형화되지 않아서 소박하고, 화염문이나 화불 등 아무런 조식이 없어 담백하며, 얼굴의 모습과 표정이 전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처럼 보여 순진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격식에 아무런 하자가 없고, 비례감 또한 좋아 안정돼 보이므로 뭇사람들의 소원을 꽤나 들어주었을 것이다. 표정 없는 것 같은 얼굴이지만 우리는 이 얼굴에서 철원 도피안사의 철불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또한 동시에 이제는 친숙한 얼굴이 되고만 북한의 여자 응원단원들의 얼굴을 떠올린다. 북방계 얼굴의 전형적인 모습이 철원 도피안사의 철불과 이 불상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는 이 불상은 통일신라 말기에 조성된 도피안사의 철불에 비해 여러 가지 면에서 미치지 못하지만 그 갸름한 얼굴에 지적이면서도 순박한 모습만은 결코 빠지지 않는다.
◆인평대군의 죽음을 슬퍼하노라=한북정맥과 그 가지들이 서로 얽히고 설킨 곳, 또 그 만큼이나 많은 크고 작은 물줄기들로 인해 포천 산하에는 선현들의 묘역이 많다. 인평대군, 인흥군, 전계대원군을 비롯한 왕실의 묘에서부터 이항복, 양사언, 서성, 조경 선생묘 등 사대부들에 이르기까지 묘소가 많은 고장이다.
신북면 신평리 신북온천 가는 길 돌모루 마을을 지나면 인평대군묘가 나온다. 인평대군(1622~1658)은 인조의 셋째아들이면서 효종의 동생이다. 인평대군은 병자호란 뒤 큰 형인 소현세자와 둘째형인 봉림대군의 뒤를 이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열다섯 어린 나이로 갖은 고초를 겪고 이듬해 돌아온다. 큰 형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고 둘째형이 왕위에 오르자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네 차례나 청나라에 다녀오는 등 외교관의 역할을 담당한다. 학문에 밝고 시서화에도 뛰어났으며 인간성도 좋았던 사람이라고 역사는 기록한다.
묘역의 한 가운데에 신도비가 서 있고 비각 안에는 치제문비가 둘 있는데 매우 특이하게도 네 사람의 임금이 제문을 짓고 쓴 것을 새긴 비석들이다. 효종과 숙종의 치제문이 하나의 비석에 앞뒤로 새겨져 있고, 또 다른 비석에는 영조와 정조의 치제문이 아래위로 새겨져 있고 뒷면은 비어 있다.
묘는 광주에 썼다가 숙종19년(1693) 이 곳 왕방산록으로 이장하였다. 신도비를 비롯한 석물들은 그대로 옮겼다고 숙종의 치제문에 기록되어 있다.
인평대군은 효종 9년(1658
포천(2)-한북정맥 끝 또아리 틀고 앉은 반월성
입력 2003-10-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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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13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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