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천을 품는다는 뜻 그대로 포천은 동북방향으로 흐르는 포천천을 따라 남북으로 좁고 긴 충적평야를 끼고 형성된 고을이다. 포천천은 과거 영평현을 흐르던 영평천과 만난 이후 한탄강으로 연천(連川)되고 임진강에 합류되면서 서해로 빠져나간다. 하천은 인간의 역사에 일정한 제약과 동시에 가능성을 부여하는 지리 환경이다. 하천범람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함께 보여주는 제약의 한 예가 되겠고 하천 계곡을 따라 형성되는 길은 인적 교류를 활성화시켜 지역발전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포천천이 30㎞ 이상을 동북쪽으로 향해 길다란 하천유로가 형성되었는데, 이 길을 통해 지금의 함경도와 강원도 등 동북지역의 물산을 받아들인 다음 서남쪽 한양으로 넘겨주던 중개지가 바로 포천이고 그 길이 곧 '동북경흥대로(東北慶興大路)'다. 통북대로(通北大路), 북관대로(北關大路) 등으로도 불리던 동북대로의 경로를 보면 서울 수유리에서 출발해 다락원, 즉 누원(樓院)→축석령(祝石嶺)→송우(松隅)→포천(抱川)→만세교(萬歲橋)→영평의 양문역(梁文驛)→풍전역(豊田驛)→원산(元山)을 거쳐 함경도 경흥(慶興)까지 이른다.
동북대로 중에서도 경기도를 지나 강원도 평강(平康)에서 부터 원산 못미처 함경남도 안변(安邊)까지의 140리 길을 삼방로(三防路)라고 불렀다. 원래 안변에서 40리 아래 관동과 관북의 경계가 닿는 곳에 관문(關門)이 있어서 천험(天險)하다고 알려진 철령(鐵嶺)을 외길로 넘어야 했는데 행인들이 험한 이 길을 피해 다니면서 세 군데 삼방 샛길을 만든 것이다. 삼방로는 곧바로 송도와 서울로 통하는 지름길이므로 서울 상인과 시골 상인이 모두 이 길로 다녔고 길목마다 이들을 상대하는 주막들이 들어선 것이다.
삼방로를 이어받아 한양으로 향하는 포천천 길은 의정부와의 경계인 소흘면에 이르러 우뚝 솟은 흘(屹)인 축석령(祝石嶺)을 만나 흘(訖)한다. 포천 일대의 수계는 이 재로 인해 모든 것의 중심을 이루는 한강과 인연을 맺지 못한다. 그러나 고개의 경사가 물은 절대로 넘기지 못하나 소를 넘기기에는 충분한 각도다. 소흘면 송우리는 동북지역의 유통중심지 원산(元山)에 모인 동해의 어물(대표적인 것이 북어다), 삼베, 임산물, 그리고 소가 이 길을 타고 내려와 한양 입성을 앞두고 축석령을 넘기 전에 휴식을 취하는 곳이다.
송우(松隅) 뒤에는 점(店), 장(場), 그리고 참(站)이 붙는다. 송우점은 주막거리, 송우장은 장터, 송우참은 역(驛)을 말하므로 이 모든 시설을 갖추고 상인과 여행객을 맞이하던 곳이 송우다. 생산자에서 소비자에 이르는 과정에는 중간 도매상인이 개입되는데 과거에는 이들을 '도고(都賈)'라고 불렀다. 도고란 관의 허가를 받지 않은 개인 도매상인, 즉 사상도고(私商都賈)를 말한다. 송우장에서 활약한 송우도고(松隅都賈)들은 원산도고나 북상(北商)으로부터, 그리고 중간 통과지에서는 강원도 통천(通川)의 상인들로부터 물품을 받아 서울 대상(大商)들에게 넘기는 역할을 하였다. 이들의 연결선은 경강변에서 동작진으로 연결되는 선(Line)과 삼남지방에서 송파장으로 연결되는 선이 핫라인을 구성해 서울 주변의 상권을 장악하고 급기야 서울 시전상인들과 경쟁하기에 이른다.
1918년 조사에 의하면 당시 전국의 우시장 수는 655개소였는데 단위시장으로서 유명했던 곳은 함경북도 명천의 '명천장'과 길주의 '길주장'으로 거래량이 2만5천마리가 넘었다. 수원, 양주, 용인 등은 2만마리 이상 거래된 곳인데 각기 남쪽지방과 동쪽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소들의 일부를 주변 일대에 분산시키는 기능을 하였다. 다음으로 1만마리 이상 거래된 시장은 12개소가 있었는데 3·8일에 장이 서는 포천 '읍내장'과 다음날인 4·9일에 여는 '송우장'이 여기에 포함된다. 송우장의 규모가 매우 컸음은 장이 2리 간격을 두고 상송우장과 하송우장으로 나뉘어 운영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번창하던 송우장이 쇠퇴하기 시작한 것은 원산항에 모인 동북지역의 물산들이 해로로 부산, 그리고 서울까지 수송되면서 부터다.
축석령은 한양을 중심으로 보았을 때 백두산의 기세가 왕성(王城)을 향해 내려오다가 한 번 크게 머무는 곳으로 여기에서 다시 일어나 도봉산이 되고 또 골짜기를 지나 다시 일어선 산이 삼각산이다. 1600년 경에는 이 곳에서 은(銀)이 생산되어 세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믿을 만한 기록도 있으므로 지금이라도 역사에 묻힌 은맥을 찾아보면 어떨까. 물론 횡재하겠다는 욕심에서가 아니고 조선시기의 채광 유적을 찾고 보존하려는 데 그 목적을 두어야 할 것이다.
포천을 빛낸 인물의 대부분은 물화를 싣고 축석령 재를 넘어 한양으로 간 상인들과는 반대방향으로 한양에서 재를 넘어와 이 곳에 은거하며 정치판과 담을 쌓은 사람들이다. 이 곳에서 한양까지는 하루 여정이 넘기 때문에 그 거리가 갖는 의미도 무시할 수 없다. 이 곳에 은거한 대표적인 인물로 박순(朴
포천(3)-한양'함경도 잇는 '物産 중개지' 명성
입력 2003-10-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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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20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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