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는 축석령 백석이고개에서 포천으로부터 한북정맥을 물려받는다. 이 맥은 만송동 벌판을 지나 고읍동의 자잘한 산들을 아슬아슬하게 지나 불곡산으로, 다시 홍복산을 거쳐 도봉산으로 남진하게 된다. 고읍동과 만송동 벌판을 지날 때는 사실 정맥이라는 느낌을 거의 받을 수 없다. 하지만 한강수계와 한탄강(임진강)수계로 엄연히 나뉘는 분수령이 평지일망정 지나고 있음에랴!


#큰 고을 양주의 큰 절 회암사

백석이고개에서 북으로 뻗은 산줄기를 타고 20여 리 오르다 보면 어야고개, 석문령, 회암령을 차례로 지나게 되는데 포천과 양주를 이어주는 고개들이다. 회암령 아래 천보산 회암사 터가 있다. 조선 최대의 국찰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발굴 규모만 해도 1만여 평이나 되어 1997년부터 지금까지 발굴하고 있는 현장이다.

인도 출신의 지공화상이 고려를 거쳐 원나라에 불법을 전하러 갔다가 그 곳까지 찾아온 고려의 나옹화상(1320~1376)을 만나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는다. 삼산양수간(三山兩水間)에 머물면 불법이 크게 일어난다는 스승의 말대로 나옹선사가 회암사에 머물며 중창하자, 채 낙성하기도 전에 열린 문수회에 신도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고 한다. 삼산은 어디인지 알 수 없으나 양수는 한강과 한탄강(임진강)을 나타내는 것이 틀림없으니 한북정맥을 정확히 꿰고 있었다는 반증이다. 나옹선사와 회암사의 인기에 놀란 조정에서는 급기야 나옹을 밀양으로 추방시킨다. 나옹과 회암사로 쏠리는 뭇사람들의 결집력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나옹은 밀양으로 가는 도중 여주의 신륵사에서 생을 마감한다.

 
'靑山兮要我以無語(청산혜요아이무어·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창공혜요아이무구·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聊無愛而無惜兮(료무애이무석혜·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如水如風而終我(여수여풍이종아·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나옹이 지은 시(詩)다. 나옹은 또 서왕가(西往歌)와 같이 쉬운 가사를 지어 널리 퍼트린 것으로 유명하다. 불교를 포교하기 위해서다. 다만, 아직 나옹의 작품인지 확실하게 고증되지 않아서 문제지만 '서왕가'는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가사이다.

회암사의 인물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무학 자초대사(1327~1405)이다. 원나라로 유학 가서 지공과 나옹을 만나 선불교를 익혔고, 고려로 돌아와서는 나옹의 제자가 되었으나 기존의 제자들이 따돌림 하는 바람에 수도생활만 열심히 했던 무학이었다. 하지만 이성계를 만난 뒤부터 그의 삶은 달라진다. 이성계와 함께 새 왕조를 개창하려는 주체세력들이 불교를 배척하는 성리학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학이 참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종교적인 입장보다는 개혁에 대한 염원이 더욱 간절했기 때문이다.

무학은 태조의 왕사로서 정신적 지주이면서 새나라 조선의 빠른 안정을 위해 노력한다. 오죽했으면 태조가 회암사에 대해 아낌없는 지원을 폈을까? 그것도 모자라 무학의 부도를 그가 입적하기도 전에 만들어 놓으라고 명령하였을까? 또한 태조가 무학으로부터 계를 받고 고기를 먹지 않아서 파리하게 야위었다는 태종실록의 기록으로 보아 태조의 무학에 대한 믿음과 불심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고려 말에서 조선 중기까지 200여년 동안 전국 제일의 수행도량이었던 회암사는 그러나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몰락하고 만다. 더구나 19세기에 들어와 순조 대에는 지공과 무학대사의 비를 어떤 사람이 깨버리고 그 자리에 제 어버이 묘를 조성하기에 이르러 벌을 주고 다시 세우는 일까지 벌어진다. 무학이 풍수지리의 대가라고 하니까 그 자리를 탐해서 일어난 일이다. 회암사 터에서 왼쪽 산길을 따라 800여m 오르면 또 하나의 회암사가 있다. 순조 때 이미 몰락한 회암사를 대신해 지공, 나옹, 무학대사 등의 부도와 부도비를 지키기 위해 세운 절이다. 세 대사의 부도는 천보산 혈맥이 시원스레 뻗어 내려온 등성이에 듬직하게 자리잡았다.

회암사의 멸망은 안성 죽산의 봉업사, 여주의 고달사와 함께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다. 또 전북 익산의 미륵사와 경주의 황룡사처럼 '큰절은 반드시 망한다'는 역사를 보여주는 것 같다. 사람이건 기업이건 종교이건 무엇이든지 대형, 아니 초대형을 선호하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회암사는 말없이 교훈을 주고 있는 듯하다.


#정조의 아유가빈

양주의 진산이자 중심인 불곡산 동북쪽 산북동에 사장골(사냥골이라고도 한다)이 있는데, 이 곳에 정민시 선생(1745~1800)의 묘가 있다. 정조 대의 명신으로 '4개의 병영을 맡고 6조의 장관을 역임하였으며 3개 도를 안찰할' 정도로 정조의 신임을 받았던 사람이다. 백성에 대해 마치 부모가 자식 걱정하듯이 '늘 다칠까 걱정하듯 살핀(시지여상·視之如傷)', 임금의 '아유가빈(我有嘉賓-나의 진실로 아름다운 손님)'이었던 것이다.

정민시 선생은 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