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항으로, 땅투기 지역으로, 그리고 미군기지 예정지구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지금의 평택 땅은 과거 행정구역을 달리하던 세 덩이 땅을 합친 것이다. 경기산하기행 연재의 첫 편인 '안성시'편에서 아산만과 평택, 그리고 안성은 안성천을 따라 뱃길로 연결되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서쪽 아산만을 향해 내려오는 안성천은 도중에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직산천을 군물포(軍勿浦 또는 揷橋浦)에서 받아들인 다음 곤지포(昆池浦 또는 昆池津)에서 진위천과 합류하는데, 그 삼각지점에서 하천 아래쪽이 원래의 평택 땅이라고 할 수 있는 팽성현이고 진위천 동쪽이 진위현, 그리고 진위천에서 서쪽으로 해안까지가 수원부 소속이었다.
충청도 평택현의 읍치(邑治)였던 팽성읍은 아산만과 안성으로 연결하는 위의 포구들을 끼고 있을 뿐 아니라 육상으로도 서울에서 제주에 이르는 국도에 근접한 교통의 요지였다. 즉, 수원에서 천안의 성환역까지는 오산점(烏山店), 청호역(菁好驛), 진위, 갈원(葛院), 그리고 소사점(素沙店)을 거치는데, 지금은 평택시 관내인 봉남리, 마산리, 동막리, 도일리, 칠원리, 소사리에 이르는 소로(小路)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평택시와 안성시에 펼쳐진 평택평야는 지형이 평탄하고 농업용수로 쓰이는 남양호·평택호 등 대단위 수리시설도 갖추고 있다. 과수원과 목장을 포함한 경작지가 전체 면적의 절반에 이르고, 이 중 논이 40%를 차지하는 곡창지대다. 그러나 역사를 추적해보면 이는 주로 외지의 세력가들이 하구(河口) 주변에 넓게 형성된 저습지에 대규모 간척사업을 벌이면서 생긴 결과임을 알게 된다. 아산만방조제가 완공된 해인 1973년 이전까지도 안성천은 해조(海潮)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앞서 언급한 군물포, 즉 현 평택시 군문동 일대까지 조수가 밀려왔고 그것이 남기고 간 염분(鹽分) 때문에 하천변 토지는 기껏해야 들깨나 콩을 재배하는 수준이었다.
바닷물과 냇물에 쓸려 다니던 흙이 갯가에 쌓이다 보면 새로운 땅이 생겨난다. 경작지가 부족했던 이 곳 주민들은 이 땅을 논밭으로 일구어 작물을 심었는데 추수 때까지 가슴을 졸이며 살아야 했다. 왜냐하면 사리, 특히 백중사리나 홍수로 큰물이 나면 작물이 잠길 뿐 아니라 불어난 물로 인해 잔뜩 개먹은 땅이 포락(浦落), 즉 빙산에서 얼음조각이 떨어져 나가듯 소리를 내며 무너져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쪽 갯가에 있던 땅이 맞은 편 갯가로 옮겨가기도 하고 그 반대의 일도 벌어져 이로 인한 소유권 분쟁도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목장으로 사용되거나 황무지로 방치되던 대부분의 땅은 조선후기 이후 관의 주도로, 또는 재력가의 투자에 의해 개간되었다. 특히 팽성에는 관둔토(官屯土)와 명례궁(明禮宮) 궁방토가 많았으며 일제에 들어와서는 '만석지기', '천석지기' 등으로 부르는 대지주들도 여럿 생겨났다. 일제가 침략준비의 하나로 1905년에 작성한 '한국토지농산조사보고'에도 평택에는 내장원(內藏院) 땅과 경성(京城) 지주의 땅이 많았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까닭에 1970년대까지 대농장의 소작인으로 일하기 위해 이주해온 주민들도 많았다. 도두리, 신대리, 남산리에는 6·25전쟁 직후에는 간사지를 간척해 정착한 주민들의 집단거주지도 생겨났다. 이 사정을 뒤집어 보면 과거로 올라갈수록 이 곳은 인구가 그다지 많지 않던 지역이라는 뜻이 된다. 면적에 있어서도 과거의 평택이 현 평택의 삼분의 일에 지나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1871년에 진사 신식(申埴)이 편찬한 '팽성지(彭城誌)'를 보면 팽성은 사면(四面)의 경계가 10여리 밖에 되지 않아 읍 뒤편 야산에 올라가 큰 소리로 부르면 주민들이 모두 듣고 모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인구로 보나 면적으로 보나 아마도 전국의 군현 중에서 가장 작은 규모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러한 조건에서도 평택에는 읍내를 중심으로 동면·서면·남면·북면의 4개 방위면이 갖추어져 있었고 그 가운데인 읍내에는 개시일이 3·8일인 장이 개설되어 있었는데 관문(官門)의 동·서·남장(東西南場)이 각각 13일과 28일, 3일과 18일, 그리고 8일과 23일에 개시하는 방식이었으며 쌀·콩·보리·면포·마포·담배·소 등이 거래되었다. 이번 평택 답사에서 서면의 읍소재지였던 팽성읍 내리(內里)의 주민들로부터 가까운 곳에 우시장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는 아마도 한 달에 두 번, 즉 3일과 18일에 섰던 서장(西場)이 분명하다.
답사 도중 내리에 들르게 된 계기는 평택시청의 박장호 문화팀장이 마련한 것인데, 그의 인도로 마을 위편 '백령산(栢嶺山)'이라는 동네 야산에서 답사에는 이력을 가진 필자에게도 처음인 '폐령비(閉靈碑)'를 찾게 되었다. 키 큰 사람 무릎 정도 높이의 이 비 측면에는 각각 '內里새마을'과 '一九七七'이 적혀 있어 1977년에 새마을사업의 하나로 참나무 당목 사이에 있던 한 평 반되는 당집을 헐면서 세운
평택(3)-조수(潮水)와 냇물이 만들어 낸 포락(浦落)과 비상(飛翔)
입력 2004-0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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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2-23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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