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시의 생명력은 서해안의 교두보 '남양만'으로 대변되고 있다. 화성지방의 내륙이 수원의 권역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면 화성의 서해안지역은 남양도호부로 불려진 역사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경기도 서해안의 관방 교두보이자 문화교류의 거점이다. 그런가하면 청일전쟁의 서전이 화성의 앞바다 풍도(楓島)에서 일어난 사실에서 19세기 서구 열강의 식민지쟁탈 제국주의 실상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땅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수원시의 화려한 화성(華城) 성곽(城郭)의 그늘에 묻혀 행정주체의 고유한 지명(地名)이 수원의 일부분으로 오인되는 화성시의 역사 현장에서 이 고장 문화의 원류인 부족국가시대 이래의 문화실상에 접근해 본다.
경기산하팀은 지난 2002년 7월 '다시보는 경기산하-오산·화성편'에서 화성시의 내륙지방 용주사, 독산성, 융·건릉, 발안, 오산의 교통과 상업문화를 조명한 바 있었다. 2년의 경기내륙 답사 여정을 뒤로하고 경기산하팀의 대장정은 올초부터 민족의 활로, 서해안으로 접어들었다. 경기지역 서해안의 관문이자 관방지역인 평택의 해안지역만을 훑어 온 경기산하팀은 지난 2월 27일 21세기 민족사의 파노라마가 시작되는 땅 화성, 서해안시대 서해고속도로가 시작되는 시발점 화성에 당도했다.
풍도가 시야에 잡히는 행정지도선 '화성호’의 갑판. 청나라와 일본의 침략행위 서막이었던 풍도 해전이 눈앞에 잡힐 듯 클로즈업 된다. 망각의 역사 현장. 1882년(고종19) 임오군란 이후 대원군의 재집권은 어떻든 보수주의와 배외정책(排外政策)의 승리였다. 그러나 이 승리는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청(淸)·일(日)양국의 간섭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동아시아 정국이 풍운에 휩싸이는 1894년(고종31) 6월 19일 청일양국의 전운이 급박하자 경성주둔의 일본군은 경성(京城), 인천(仁川), 평택(平澤)이남의 남도 등 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점유하기 위해 우선 아산으로 출발하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8일후인 6월 27일 청나라의 북양해군중영부장(北洋海軍中營副將) 방백겸(方伯謙)이 이끄는 제원(濟遠), 광을(廣乙)등의 제함대(諸艦隊)와 일본국 제일순격대사령관 해군소장 평정항삼(坪井航三)이 이끄는 길야(吉野), 낭속(浪速), 추진주(秋津洲) 등 제함(諸艦)이 화성의 서해안 풍도(楓島) 앞바다에서 교전을 벌이게 된다. 결과는 청군의 광을(廣乙)이 격침되고 제원(濟遠)은 도주하는 등 풍도의 서전은 일본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이후 평택만에서의 일본군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청·일전쟁의 결과는 요동반도와 대만을 일본에 넘겨주게 되어 만주까지 손아귀에 넣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풍도 앞바다의 파고(波高)는 19세기 서구열강의 식민지 쟁탈과 맞물린 일본의 야심이 드러난 역사적 사건. 되돌아오는 행정지도선에서 바라본 남양반도의 화성시 산하는 역사의 태동지 서해의 길목 그것이었다.
삼한(三韓)시대 상외국(桑外國) 원양국(爰襄國)의 터전이었던 장안·우정면 일대, 남양만 일원이었던 비봉·남양·마도·송산·서신·팔탄지역은 남양반도 구봉산 정상에 위치한 당항성(唐項城)이 말해주듯 역사이래 서해안의 중요 교통요지였다.
우선 이 지역의 관방유적은 서신면 광평리에서 시작해 송산면 육일리로 이어지는 총 15㎞의 석성(石城), 남양장성(南陽長城)을 들 수 있다. 829년(신라흥덕왕4) 당항성에 진(鎭)이 설치될 때 내륙교통로 요지에 축조되었던 관방이다. 이제 남양도호부의 전략적 거점이 될 수 밖에 없는 서해안의 교두보 남양반도에 설치되었던 군사통신시설 봉수대(烽燧臺)의 현장을 살펴본다. 봉수란 말은 봉(烽)-횃불(炬)과 수(燧)-연기(煙)로 변방의 급한 소식을 중앙에 전하던 고대의 통신방법이다. 높은 산위에 올라가 불을 피워서 그 불빛과 연기로 신호를 전달했는데 밤에는 횃불(煙火)이 잘 보이지만 낮에는 잘 보이지 않으므로 불꽃 대신 연기로서 신호를 보내던 국방상의 중요한 임무를 알렸던 경비 통신의 역할을 담당하던 제도였고 그 시설이었다.
봉수대에서 피어오르는 횃불(연기)이 하나이면 국경이 태평하다는 뜻이고 둘이면 적정에 이상이 보인다는 것, 셋이면 국경지대에 외적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는 뜻이고, 넷이면 외적이 국경을 침범하는 상태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횃불이 다섯이면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임을 나타낸다.
조선시대의 봉수제도는 1394년(태조3) 한양천도후 1423년(세종5)에 서울 남산인 목멱산에 최종집결하는 전국의 5거제(五炬制)가 설치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에 따라 전국적인 봉수노선인 제1거에서 제5거까지로, 노선의 봉수는 반드시 경기지역을 거쳐 남산봉수에 최종 전달되도록 조직 운용되었다.
여기서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오는 해로봉수(海路烽燧)의 중요거점이었던 화성시의 서해안 봉수는 평택항의 괴태봉수에서 연결되는 흥천산봉수(우정읍 화산리)와 염불산봉수(서신면 상안리), 해운산봉수(송산면 독지리)였으며 안산(安
화성 해안지역(1)-남양은 '경기 서해안의 교두보'
입력 2004-03-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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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3-08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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