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지면서 커져 간 고양
고양은 한강을 끼고 있지만 한강의 혜택을 그리 크게 받지 못한 땅이다. 한강가의 숱한 이름 짜한 나루에도 고양의 그 것은 빈약하다. 이웃한 마포나루와 공암나루, 혹은 양화진과 노량진, 아랫녘으로 김포의 조강나루에 비해 행주나루의 명성은 그리 크지 않은 듯하다. 고양지역 한강 유역의 길고 넓은 개펄은 나루의 발달을 막았고, 특히 한양과 가까운 훌륭한 이웃 나루들의 명성에 묻힐 수밖에 없었다.
고양은 한양의 지척에서 오히려 북한산성이 있는 요새지이자 관서대로(의주로)의 길목으로 중요성을 인정받았던 땅이다. 전근대 고양은 1번 국도가 통과하는 벽제읍 지역이 중심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 고양 땅의 한복판에 있는 원당읍으로 중심지가 이동하다가 1908년 경의선 철길이 깔리고 한강을 따라 '자유로'가 뚫리면서 지도읍과 일산읍이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해 온 역사를 지닌다.
즉, 통일로 동북쪽 지역 벽제읍에서 통일로와 경의선 철로 사이 야산지대인 원당읍을 지나 경의선 철로의 서남쪽 지역 평야지대인 일산읍과 지도읍으로 인구와 물산이 이동해온 셈이다.
#오, 백마!
1970년대말 혹은 80년대초 삭막한 도시 생활의 답답함과 무료함을 달래며 서울을 벗어날 수 있는 곳이 너무도 가까이 있었던 고양 땅이다. 고등학교 시절 서대문 무악재 언저리에서 하숙을 하던 때 아무 이유도 없이 버스 종점까지 가곤 하였다. 서울풍경과 다른 어떤 것이 있었을 것 같은 막연한 기대에서 였다. 종점이었던 삼송리에서 조금만 걸으면 곡릉천을 만나게 되고 벽제역 근처의 서울 교외선 철길과 만나는 지점에 와서야 비로소 삭막한 감상이 해갈되곤 하였다. 그 해갈은 저 너머 '통일로'를 지나면 멀고 먼 북녘이라는 막연한 격절감과 연결되곤 하였다.
이런 추억과 낭만은 서부역 혹은 신촌에서 경의선 열차를 타고 능곡 혹은 백마에 내려본 사람들은 누려봤음직한 충만함이다. 서울에서 몇 정거장 지나지 않았지만 시골의 풍취가 물씬 풍기는 그곳의 넉넉함은 떠나온 자들의 들뜸으로 한껏 부풀어 오른 자유와 만날 수 있었다. 그 아름다운 이름의 백마역이 백석동과 마두동의 첫 글자에서 왔음을 몰랐어도 좋았던 그때, 지금은 일산신도시의 가장 번화한 지역으로 바뀐 세월의 흐름을 어이하리. 고양은 오랜 세월동안 서울의 변화와 가장 밀접하게 영향을 받았던 땅이다.
#가까운, 서울과 너무 가까운
조선 태종 때 고봉현과 덕양현을 합쳐 고양군이 된 이래 조선시대 내내 한수 이북 41개 군현 가운데 7번째로 큰 역량을 지켜왔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한성부가 경기도의 경성부로 바뀌며 축소되면서 한성부 땅을 받은 고양군은 기존의 2배에 가까운 영역으로 늘어 12개면을 관장하게 되었다. 현 고양시 지역 뿐만 아니라 서울시의 마포·영등포구 일부와 용산·서대문·은평·성북·동대문·중랑·광진·성동·송파구 일부까지 고양군 관할이었으니 한양 도성 이외의 서북 땅이 다 고양군이었던 셈이다.
1914년 이래 1936년 용강·연희·한지면이 다시 경성부로 편입되어 9개면으로 될 때까지 고양군의 지역적 규모가 가장 컸던 때이다.
서울이 가장 작았을 때 고양은 가장 컸으니, 서울과 연관된 변화의 폭이 가장 컸던 도시가 고양이기도 했다. 해방 후 1949년 은평·숭인·독도(뚝섬)면의 일부가 다시 서울시로 편입되어 고양군은 지도·신도·원당·중·송포·벽제면의 6개면으로 축소되어 경기도에서 가장 작은 군으로 전락했으니…. 그러나 1980년대말 서울인구 팽창을 막고 수도권에 새로운 신도시 건설을 목표로 1990년대 일산신도시가 개발되면서 고양은 다시금 경기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 가운데 하나가 되었으니 서울과는 불가분의 관계인 셈이다.
#한강의 대홍수
1989년 4월 분당과 일산신도시 개발계획이 해당 시·군의 수장이나 도지사도 모른 채 대통령의 기자회견으로 발표되었을 때 일산지역 농민들의 반대는 격렬했다. 분당은 외지인들에 의해 어느 정도 땅투기가 되었던 지역인 반면 일산은 '능곡쌀' 또는 '일산미'로 알려진 맛좋은 쌀을 생산하는 넓은 평야와 조상 대대로 살아온 터전이었으니 그것을 지키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였던 셈이다.
그러나 이듬해 1990년 한강의 일산제방이 무너지면서 어마어마한 물난리는 일산신도시 개발의 반대를 가뿐하게 잠재웠다. 즉 1990년 9월9일부터 연 사흘간 중부지방을 강타한 집중호우는 한강의 댐들의 저수능력을 마비시켜 방류함으로써 12일 새벽 일산제방이 무너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고양의 지도·일산읍과 송포면 일대가 침수되어 바다와 같이 된 현실은 고양의 역사 이래 가장 참담한 상황으로 새로운 건설을 기정사실로 만들었던 것이다.
대보둑으로 알려진 일산제방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지칭되는 미증유의 대홍수 뒤에 1930년대 초까지 일제에 의해 축조되었다.
을축년 대홍수는 1925년 7월6일
고양(1)-한강 둑 터지며 커져간 고장
입력 2004-06-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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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6-28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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