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북부지역인 황해도, 강원도에서 서울로 직통되는 유일한 도로는 포천의 43번 국도와 연천에서 동두천, 의정부를 거쳐 미아리로 연결되는 경원선 국도이다. 특히 동두천을 관통하는 도로는 천험의 지세인 소요산과 마차산이 기각지세로 바라보며 요충을 이루고 있다. 때문에 6·25 한국전쟁 초기 동두천의 봉암리 일때는 남진하는 북한군의 주력부대와 이를 저지하기 위한 한국군이 치열한 접전을 벌여야 했다. 군사도시로 성장한 지리적 여건에서 주한미군의 주력부대가 주둔할 수 밖에 없는 안보요충도시 동두천의 태생적 운명이 답사반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다.
 
동두천시는 경기도 북단에 위치하여 수도를 방위하는 전진기지다. 대부분이 산지로 이루어져 있고 중앙으로 강화천과 동두천천이 구릉지를 북류(北流)하면서 연안에 좁은 충적지(衝積地)를 형성해 동두천 주민들에게 생활무대를 제공하고 있다. 서쪽으로 마차산, 동쪽에 소요산을 비롯하여 국사봉, 수위봉, 왕방산, 해룡산 등의 높은 산으로 둘러 싸여 있다. 경기 소금강으로 불리는 소요산에는 원효폭포, 청량폭포, 비룡폭포가 수려한 산세를 돋보이게 하고 있으며 동쪽으로 왕방산의 왕방폭포, 국사봉의 백운폭포 등이 심산궁곡(深山窮谷)의 정취를 더해주고 있다.
 
이중환은 동두천 지방의 지형에 대해 '택리지'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함경도 안변부 철령(鐵嶺)의 일맥이 남으로 500∼600리를 달려서 양주의 여러 작은 산이 되고, 동북쪽에서 비스듬히 돌아들면서 갑자기 솟아나 도봉산의 만장봉이 된다”고 하였다. 동북쪽은 높이가 400∼500m 이상되는 높은 산들로 험한 산지를 이루었고, 국사봉과 서쪽으로 소요산이 솟아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
 
역사이래 동두천시의 영역은 양주군의 이담면(伊淡面) 지역이었다. 1963년 동두천이 읍(邑)으로 승격된 이후 군사도시로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1979년 7월1일 포천군 포천면 관할이던 탑동의 3개리가 동두천읍으로 편입되어 행정구역이 확장되었다. 1981년 7월1일 양주군에서 분리되면서 동두천은 시(市)로 승격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비록, 분가한지 23년의 짧은 여정이지만 현대사에 드리운 동두천시의 명·암은 한시대 민족사의 아픔으로 치부되는 오늘이다. 세계도시로 세인에 회자되고 있는 동두천시의 산하에서 통일의 이정표, 그 무한한 잠재력의 생명력을 일깨우고 있는 문화유산의 현장으로 가 본다.
 
동두천은 한반도의 중앙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아주 이른 시기부터 인간의 거주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는데-동두천 지역에서는 아직까지 구체적인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발견된 예는 없지만-우리나라 구석기유적을 대표하는 전곡리 구석기유적이 동두천과 불과 10여리 인접한 연천군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에서 짐작할 수 있다. 청동기시대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농경이 시작되었는데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묘제인 고인돌들이 동두천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청동기시대의 동두천을 파악할 수 있다. 지행동, 송내동 일원에서 고인돌과 관련된 유적이 확인된 바 있는데 고인돌은 일정한 규모 이상의 세력집단에 의해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고인돌을 축조할만한 세력집단이 동두천 일대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행동 242에 있는 이 고인돌은 동두천 남쪽으로 양주시와 경계를 이루는 노고봉(302m) 산록 아래 아차노리 마을 앞 남쪽의 아차산 끝자락과 마을이 맞닿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고인돌터의 주변지세를 살펴보면 뒤(북서향)는 산으로 둘러쳐져 있고, 앞쪽(동남향)에도 얕은 산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 사이를 강화천(江華川)으로 유입되는 실개천의 합수지점(合水地点)이 고인돌터 앞을 흐르는 등 당시인들의 생활터로도 매우 적합한 요건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지역 지표조사에서는 격지 1점과 토기편 3점이 수습되었다. 송내동 고인돌은 송내동 203에 위치하고 있다. 덮개돌의 동남쪽 끝부분과 하단부에는 치석한 흔적이 보이고, 동남쪽 하단부에는 바닥 흙이 단(壇)처럼 다듬어져 있고 북서쪽의 일부는 물에 잠겨 있다.
 
동두천의 이 같은 역사는 근세에 들어 오늘날의 정체성을 띠게 되는데, 6·25 한국전쟁으로 급부상한 동두천시의 정체성에 천착하는 답사여정이다. 민족사를 일관하는 외세침략과 이에 맞서는 항쟁의 역사에서 무신(武臣)의 역할이 새삼 되짚어지는 동두천 산하다. 동두천이 배출한 역사적 인물에서 첫손을 꼽는 인물은 단연 무신으로는 어유소(魚有沼)장군, 문신으로는 신익상(申翼相)이다.
 
여진정벌의 선봉에서 조(朝)·명(明) 외교의 일익을 담당했던 국익의 상징, 어유소 장군의 여진정벌기록을 '동국사략(東國史略)'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명나라 건주위 이만주가 명나라를 배반하여 명나라가 이만주를 토벌하니 조선이 또한 공격할 때 어유소, 남이 등이 함경북도로부터 곧바로 압록강을 건너서 올리부의 건주위 본거지를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