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의 주둔 때문에 도시로 발전한 동두천, 한국 땅에서 미군이 가장 많이 주둔하고 있는 도시, 기지촌의 대명사이던 동두천이 흔들리고 있다. 미군이 없는 동두천을 상상해 본적이 있는가?
 
동두천시는 전체 면적의 75%가 군사시설보호구역 및 미군 공여지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에서 미군이 가장 많이 주둔하고 있다. 주한미군 3만5천명 가운데 1만5천명이 동두천에 거주한다. 더욱이 동두천 시 전체 인구 7만3천명의 21%에 해당하는 3천600가구 1만5천여명이 주한미군 관련 생업종사자이고, 미군 관련 경제 규모는 연간 1천400억원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지역총생산의 20%에 달하고 있다. 따라서 동두천은 미군의 존재를 전제로 만들어졌고 운영되었던 '군사도시'라 할만하다.
 
그러한 동두천에서 미군이 떠나간다고 한다. 1951년 이래 미군은 이 곳 사람들에게 물어보지 않고 드넓은 땅을 차지해 기지를 만들어 주둔했듯이 또 다시 아무런 사전 협의나 망설임 없이 그들의 필요에 따라 동두천을 떠나간다. 이 것이 한미관계의 본질이다. 2003년 4월부터 시작된 보산동 429 '한·미 문화의 광장’ 개설 공사는 이런 점에서 동두천의 현실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기지촌이라는 오욕의 역사
 
'동두천'이라는 이름에는 분단의 상처가 켜켜이 엉켜있다. 1992년 10월 미군에 의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윤금이씨 살해 사건이 보산동에서 있었고, 2002년 6월 미군 궤도차량에 치여 죽은 심미선·신효순 사건에 대하여 동두천 캠프 케이시 미8군 군사법정은 무죄 평결을 내리는 것을 보아야 했다. 동두천은 기지촌의 영욕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그것도 너무나 커다랗게.
 
산과 계곡에 울타리 치고 자리 잡고 있는 430만평의 캠프 케이시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조상대대로 살아왔던 걸산동 주민들은 마을을 오가는데도 미군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50년 세월을 견뎌왔다. 소요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넓고 깊게 펼쳐진 계곡을 온전히 제 땅으로 하는 천혜의 자연 요새의 미군기지의 그 광활함에 비한다면 3번 국도와 경원선 그리고 신천이 흐르는 동두천 시내의 옹색함은 한편의 블랙코미디다. 3번 국도나 상패동 신천이 미군기지의 비협조로 확장되지 못하여 겪는 교통문제와 1998년의 수해는 혈맹인 미군의 존재를 분명히 보여준다.
 
정녕 동두천이 살아갈 길은 미군의 비공식적 영역에서 기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캠프 케이시 정문 앞의 인디언 상은 많은 것을 떠오르게 한다. 6·25전쟁으로 부대기를 빼앗긴 미2사단은 인디언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바꿔놓았다. 아메리카의 정당한 주인이었던 인디언들을 학살하며 내쫓고 얻은 풍요는 그들의 후안무치를 도왔다. 폭력과 기만의 미국사는 전 지구적으로 보다 세련되고 우아한 형태로 바뀌었을 뿐이다. 앞 세대 미군 기병대는 인디언을 박멸해야 할 학살의 대상으로 삼았고, 후세대 미군부대는 사냥당하며 용맹하게 싸웠던 인디언을 그들 부대의 상징으로 바꿔치기 했으니 말이다.
 
미군 없이 홀로 서야 하는 동두천을 본다는 것은 앞으로 우리의 미래를 미리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당장은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장기적으로 자연친화적이며 자족적인 도시를 만드는 일이다. 2천800만평의 동두천시 면적의 절반 가까운 1천200만평의 미군 기지를 반환받는다면 동두천의 미래는 그리 어둡지만은 않다.

#한탄바이러스-유행성 출혈열 병원체 발견기념비
 
동두천에는 현충탑, 충현탑, 벨기에·룩셈부르크 참전기념탑, 노르웨이참전기념비, 반공희생자 위령탑 등이 있다. 이러한 기념비와 사뭇 내용과 형식이 다른 것이 있어 눈길을 끈다. 깊은 계곡의 끝자락, 아늑한 마을 송내동에 자리한 '유행성 출혈열 병원체 발견기념비'가 그 것이다. 다른 기념비에 비해 표지판도 없어 답사팀은 마을을 중심으로 뜨겁게 내리쬐는 강렬한 태양빛을 온 몸으로 맞으며 전전긍긍 찾아 헤맨지 1시간 여. 풀숲에 뒤덮여 방치된 채 있는 낯설고 낯선 '유행성 출혈열 병원체 발견기념비'를 찾았다.
 
군대에 가서야 제대로 배웠던 '유행성 출혈열’은 들쥐가 옮긴다 하여 풀밭에 함부로 눕지 못하게 하였다. 말라리아, 간염과 더불어 세계 3대 전염병으로 알려진 이 전염병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이래 매년 수백 명씩 죽어가면서 여러 나라에서 집중연구를 하였지만 병원체를 발견하지 못했던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호왕 교수팀은 동두천 송내동의 등줄쥐를 통해 1976년 세계 최초로 병원체를 발견한 것이니 바로 '한탄 바이러스’이다. 이에 1989년 유행성 출혈열의 진단방법을 완성하고 1990년에는 예방백신도 개발함으로써 바이러스 발견, 진단 및 예방백신의 개발까지 유행성 출혈열의 퇴치를 위한 모든 과정을 수행했다. 발견기념비는 이들의 불굴의 노력과 헌신을 이 곳 송내동 등줄쥐에게 공덕을 돌리는 겸양으로 보인다. 아름다워라! 솔안의 풍광과 사람들의 마음씀이여. 이 것이 동두천이 갈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