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지역은 반도로 동쪽으로 한강과 이어져 있다. 한강 건너면 파주·고양
시와 접해 있으며 서쪽은 염하강을 건너 강화도가, 북쪽에는 조강을 건너
개풍군이, 남동쪽은 서울·인천·부천시와 접한다.
남동에서 북서로 길게 돌출해 있는 김포반도는 오랜 침식작용을 받아 낮아
진 준평원과 한강 중상류및 지류에서 운반된 토사가 매립돼 발달한 충적지
가 합해져 지형이 전체적으로 평탄한 평야지대를 이루고 있다.
이처럼 천혜의 평야와 한국의 젖줄인 한강을 끼고 있어 농경문화가 일찌감
치 발달, 우리나라 최초의 쌀 생산지로 알려져 있고, 고구려 장수왕 63년
(476년) 최초로 김포라는 지명이 쓰였던 것으로 기록에 남아있다.
평야지대인 만큼 타 고장과 비교해 문화유적 및 사적지가 많지는 않으나 문
수산성과 덕포진, 한재당, 대성원, 김포 및 통진향교, 우저서원 등은 지역
문화재로 고장의 자랑거리다.
이 가운데 향토유적으로 지정돼 관리돼 오고 있는 대포서원, 대성원, 심응
사당, 군하리 비군, 봉수대등에 대한 연혁 등을 살펴본다.
향토유적 1호인 양촌면 대포리 대포서원은 조선전기의 대학자이며 문신인
양성지(1415~1482)선생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우다.
1791년에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출생지에 월곡서원이 창건됐고 만년
을 보낸 통진에 서원 건립을 주선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다 남원양씨 문중
에서 지난 1973년 대포리에 있는 선생의 묘소밑에 사우를 짓고 이곳 지명
을 따서 대포서원이라 했다.
건물은 좌측에 현대식 강당과 그 후면으로 3문과 사당이 있다.
남원양씨 문중에서는 선생의 업적을 후손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지난해
서원을 새롭게 단장하는 등 관리에 정성을 들이고 있다.
대곶면 약암리 승마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향토유적 3호인 대성원은 조선
말기 이 고장 출신의 유생인 심성택선생이 사재로 이 건물을 축조해 지금
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대성원은 현재 입구에서 삼문까지는 장대석의 돌계단이 깔려져 있고 양 옆
에는 대나무가 심어져 있어 고고한 선비의 기품을 느끼게 하고 있다.
삼문 안쪽의 본원은 팔작지붕의 한식기와를 얹은 굴도리집으로 기둥은 장초
석으로 받쳤고 장여(도리밑에서 도리를 받치고 있는 나무)와 도리(기둥과
기둥위에 건너 얹어 그 위에 서까래를 놓는 나무)에 새로 단청을 입혔다.
벽체는 지난 1987년에 시멘트로 보수돼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건축
돼 있다.
이곳 역시 청송심씨 문중에서 관리해 오고 있어 조경이나 단청상태 등이
꽤 양호하다.
향토유적 4호인 심응사당은 운양동 한옥마을 뒤 천현마을 한 가운데 정면
3.9m 측면 3.3m 규모로 자리잡고 있다.
이 사당은 조선전기의 무신인 심응(?~1504)선생을 제향하기 위해 조선말기
에 건립된 목조건물로서 홀처마에 맞배지붕 건물이며 방풍판이 있다.
심응선생은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웠던 인물로 알려져 있으
며 철전을 잘 쏘는 등 뛰어난 무예로 이름을 떨쳤다. 현재 풍산심씨 문중에
서 관리하고 있다.
월곶면사무소 주차장 한쪽에는 세월이 묻어나는 17기의 비가 일렬로 들어
서 있다.
향토유적 5호인 군하리 비군이다.
조선중기부터 말기에 걸쳐 건립된 비들로 이 지역에 부임해 선정을 베풀었
던 목민관들의 치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
이 고장 곳곳에 건립돼 있던 비들을 지난 71년에 모아 면사무소로 옮겨 관
리해 오고 있으며 역대 행정관들의 치적 등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
고 있다.
향토사적 6호인 월곶면 군하리 봉수대.
이곳 남산 꼭대기에 올라가면 15㎡ 규모의 평탄한 대지가 마련돼 있다.
이것이 바로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봉수터다.
당시 강화의 대모산 봉수에서 보내진 소식을 이곳에서 받아 다시 양서면 개
화산 등의 봉수터를 거쳐 서울의 남산까지 전해졌다.
현재 석축이 모두 무너져 내려 있는 등 정상부분이 완전히 유실돼 있어 원
래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어 아쉽다. <김포>
◆ 돌우물의 전설
대곶면 석정리는 조선시대까지 통진현 고리곶면 읍정리였다. 이 곳에 물맛
이 좋아 식수로 사용해온 '돌우물'이 있으며 여기에는 전설이 서려있다.
양주에 있던 조선조 장릉(16대 인조의 부친으로 추존왕인 원종과 인헌왕후
의 능)을 김포의 이 곳으로 개장하기 위해 능 역사(役事)를 할때, 광중(壙
中)에서 많은 샘물이 솟구쳐 나왔다.
이 샘물로 하관을 할 수 없어 혼란을 겪던 차에 지관이 수맥을 따라 현 위
치(당시는 개펄이었다 함)에 도착, 조그만 샘물을 크게 파헤치게 하니 돌틈
에서 많은 양의 물이 솟구쳐 나왔다.
이후 장릉의 광중에서 솟던 물이 멈춰 능역사를 순조롭게 마칠 수 있었다
고 한다.
한편 돌우물은 통진현의 원이 이 우물의 물을 길어오게 해 식수로 사용했는
데 골(고을)의 우물, 곧 골우물에서 물을김포>
[시·군지정 문화재 - 김포편] 선비의 고고한 기품 '닮고픈 마음'
입력 2002-04-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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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4-12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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