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잿머리 성황당
안산은 원래 고구려의 장항구현 또는 고사야홀차현인데 신라 진덕왕이 장구
현으로 고쳤으며 신문왕때 장구현으로 승격됐다.

고려초기에 안산현으로 고쳤다가 현종 9년(1018)에 수주(수원)의 속현으로
되었다. 충렬왕 34년(1308)에 덕종, 정종, 문종이 탄생한 명예로운 고을이
라 하여 안산군으로 승격돼 이후 지사의 다스림을 받았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종 13년(1413) 전면적인 지방통치 조직의 개편이 있었
고 그 일환으로 실시된 8도제의 시행에 따라 경기도에 예속, 안산군으로 되
어 이후 군수가 파견되기에 이르렀다.

고종 32년(1895) 경기도의 4등군이 되었다가 1914년 시흥, 과천, 안산의 3
개군이 시흥군이란 명칭으로 통합됐다.

1976년 시흥군의 수암·군자면과 화성군의 반월면 일대가 반월 신공업도시
로 조성되면서 해마다 인구가 증가되어 지난 86년 1월 시승격과 함께 안산
의 뿌리를 찾아 안산시로 부르게 됐다.

안산에는 20개 유적의 향토문화재(잿머리 성황당과 선부도 지석묘, 강징 선
생 묘 및 신도비, 김류 선생 영정, 부계팔경도, 최용신 선생 묘, 홍정희 효
자문, 대부도 자선비 등)가 있다.

■ 잿머리 성황당 유래
안산시 성곡동 산 76에 위치한 잿머리 성황당은 다른 여러지방의 성황당과
는 달리 발생유래가 특이하다.

일반적인 성황당이 한마을 단위만의 제액초복을 기원하는 신당으로 발생한
데 반해 잿머리 성황당은 발생설화가 독톡하다.

고려 6대 성종(982~997)때 내부시랑 서희가 송나라 사신으로 가게되어 잿머
리 해안(현재 당집이 있는 아래)에서 배를 타려고 했을때 갑자기 잠잠하던
바다가 폭풍우가 몰아쳐 배를 띄울 수가 없었다.

그날 밤 서희가 장도를 비는 제를 지내고 잠이 들었을때 꿈에 소복을 한
두 여인이 나타나 “우리는 신라 마지막 임금 경순왕(김부대왕)의 비 홍씨
와 친정 어머니 안씨인데 경순왕과 결혼 후 나라가 망하고 비명에 죽은 것
이 한이 되어 모녀 혼령이 안주치 못하고 이렇게 배회하고 있으니 저희 거
처라도 마련해 주십사고 이렇게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하자 그렇게 하겠다
고 약속했다.

서희는 이튿날 그곳에 작은 성을 쌓고 사당을 지은 후 화공을 불러 꿈에
본 영정을 그려 모신이후 위령제를 지냈다.

그러자 신기하게 바다가 잔잔해지고 서희는 아무탈 없이 송나라에 다녀오
는 등 막중한 외교임무를 수행했다.

이 설화에 나타났듯이 잿머리 성황당은 항로를 트고 외교 임무를 완수했으
며 왕비의 원한을 달랜 역사적 의미를 담은 성황당이다.

그후부터 중국을 드나드는 사신은 물론 이곳 백성들도 이 사당에 제물을 차
려놓고 극진히 정성을 드리며 마을의 안녕을 기원했다.

지금도 당집이 있는 산에는 서희가 쌓은 성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매년 잿
머리 성황제를 지내고 있다.

■ 최용신선생 묘
심훈이 '상록수'에서 청석골이라 부른 마을이 바로 안산시 본오동의 샘골마
을이다. 또한 농촌의 문맹퇴치를 위해 야학에 온 힘을 기울이는 '채영신'이
란 여자 주인공의 모델이 일생을 농촌계몽운동에 헌신한 최용신이다.

최용신의 묘는 안산시 본오동 879의4에 자리잡고 있다.
최용신은 1909년8월 함경남도 원산읍 두남리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곤궁한
어린시절부터 신앙심이 깊어 열심히 교회에 다녔으며 루씨여자보통학교와
루씨여고를 나왔다.

서울에 있는 감리교협성신학교 졸업을 1년 앞둔 1931년 9월 그녀는 학업을
중단하고 샘골마을로 내려와 농촌계몽운동을 펼쳤다. 이 마을에서 농촌계몽
운동을 실천에 옮긴 선구자였다.

그녀는 유학중에 얻은 병과 과로가 겹쳐 26세 꽃다운 나이에 죽었다. 지난
74년 루씨 동문과 천곡교회에서 상록수 최용신 선생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
를 세웠다.

■ 홍정희 효자문
홍정희 선생은 조선후기 1880년대에 초 대부남동에서 태어난 이름난 효자로
서 본관은 남양이다.

그는 어릴때부터 성격이 온순하고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정성을 다
해 부모를 봉양했으며 그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특히 부친이 별세하자 그는 깊이 애통해 하며 묘소 앞에서 여막을 지어놓
고 그곳에서 3년동안 거처했다.

그의 뛰어난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고종 30년 6월 효자 정문이 안산시 대부
남동 748에 건립되고 만인의 귀감으로서 표상되었다. 효자문 규모는 정면
3.2m, 측면 1.35m이다.

■ 대부도 자선비
안산시 대부남동 85의17 남1동과 남3동 중간 도로변에 세워진 대부도 자선
비는 한말 이 고장의 덕망 높았던 재산가 이찬 선생을 기리는 자선비로 석
재가 화강암이며 대석(臺石)은 시멘트조의 높이 140㎝, 폭 34.5㎝, 두께 15
㎝이다.

선생은 일찍이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한 소작인들에게 빚과 소작료를
탕감해주는 등 큰 덕량을 베풀었다.

선생이 별세하자 은혜를 입은 마을사람들이 거향적으로 장례를 치르고 생전
의 고마운 마음씨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