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의 관문인 축석령부터 금강산까지는 직선거리로 불과 106㎞밖에 되지 않아 '금강산 가는 길목'으로 널리 알려진 포천군은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한 중북부지방의 교통·군사요충지로 궁예와 조선태조 이성계의 전설이 유난히 많은 곳이다.
포천군의 한복판을 가르며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포천천이 한탄강으로 이어져 한반도의 서북지역과 한강본류의 하류지역으로 연결돼 있고 동북쪽으로는 추가령 지구대를 따라 이동통로가 열려 있어 역사의 격변기마다 전략적 요충지로서 역할을 해왔다.
또 충효의 고장답게 독립투사 최익현·이규채·이범영·최면식·조영원선생과 영조때의 청백리 정만석, 선조때 효자 신급, 숙종때 효자 오백주 등의 묘와 정문 그리고 이들의 발자취가 담겨 있는 유적들이 곳곳에 남아있는 유서깊은 곳이다.
▲금수정(金水亭)
포천군 창수면 오가리에 위치한 금수정은 향토유적 17호로 영평천(永平川)의 수면에서 8m정도되는 절벽위 평평한 대지위에 서있다. 영평천으로 둘러싸인 옛 영평현의 구읍지와 인접해 있던 금수정은 영평 8경의 하나로 손꼽히던 정자이기도 했다.
주위에는 창옥병(蒼玉屛)을 비롯해 준암·연화암·동천석문(洞天石門)등 기승지(奇勝地)가 펼쳐져 있어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이 이 정자를 찾아 시주(詩酒)와 풍류(風流)를 즐겼던 곳이다. 당대의 시인이며 명필인 봉래 양사언선생을 비롯 사암 박순, 한음 이덕형 등 지역과 연관깊은 명유들에 얽힌 많은 일화가 남겨져 있다.
양사언이 금수정 10m위 바윗돌에 새긴 ‘취대(翠臺)’라는 글씨와 냇가 한복판 바위에 '부도(浮島)'라고 쓴 각자 등은 그 좋은 예일 것이다. 이 정자의 건립연대는 앞의 명유들과의 인연으로 보아 조선 전기인 16세기 초 전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 금수정은 6·25동란시 자취도 없이 소실돼 장초석만 남아있던 것을 지난 89년 복원사업에 들어가 정면 2칸, 측면 2칸, 면적은 17㎡, 처마높이 4m, 최고 높이 7m로, 초석은 화강암 장초석(길게 세운 주춧돌)등으로 덧서까래 겹처마 팔작지붕형식(서까래위에 짧은 서까래를 잇대어 지은 형태)의 옛모습대로 복원 중수됐다.
▲구읍리 미륵불상(舊邑里 彌勒佛像)
향토유적 6호인 이 미륵불상은 고려중기 이전의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 4.44m, 어깨폭 1.15m, 가슴폭 75㎝의 크기로 포천군 군내면 구읍리 속칭 새말입구에 있다.
이 마을 전설에 의하면 신라때 어느날 갑자기 남녀 미륵불 한쌍이 옥계천을 중심으로 솟아나 현재는 여미륵상만 남아 있다고 하나 그것이 이 석불인지는 알 수 없다. 화강암 1석으로 조성된 이 석불입상은 전체적으로 규모가 웅대하고 후덕하면서도 위엄있는 인상을 보여주고 있다.
머리에는 연화문이 조식된 관모형의 보관(寶冠)을 쓰고 그 위에 판석(板石)과 같은 보개(寶蓋)를 얹어 놓았다. 상호(얼굴의 형상)는 원만한 편으로 양미간과 비량(鼻梁:콧마루), 구순(口脣) 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양 귀는 커서 어깨 부분까지 길게 흘러 내렸고 목에는 3도(세겹의 목주름)가 돌려져 있다.
법의는 통견(얇은 비단)으로 양쪽팔에 걸쳐 유려하게 흘렀으며 수인(불상이 깨달음을 두손으로 나타내는 모양)은 오른손을 가슴앞에 들어 엄지와 장지·약지를 잡았고 왼손은 앞에서 상장(上掌)하고 있다.
▲태봉산성지(泰封山城址)
포천군 영중면 성동리에 있는 이 산성지는 향토유적 29호로 높이 2.5m, 성곽 둘레가 1~2㎞에 이르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 산성은 918년 궁예가 철원에서 그의 부장이었던 왕건군에게 쫓길 때 한때 웅거하며 항전했던 성지로 알려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궁예왕은 지연전을 펴기 위해 북강(현 한탄강)에서 백성과 군사들이 일렬로 서서 돌을 전달, 급히 축성한 성이라 하나 그 여부는 알 수 없다.
또 그는 이곳 싸움에서 패하여 패주골(현 파주골 순두부촌일대)을 경유, 울음산(명성산)에 도착해 도읍지 철원을 바라보고 통곡했다는 전설도 있다.
이 산성은 조선 23대 순조의 세자 익종의 태를 안치했던 곳으로 흔히 태봉산성이라 불리기도 한 것은 이때문이다.
이 산성의 규모가 본래 어느 정도인지 확실치 않으나 현재 높이 2~5m, 둘레 1㎞이상으로 추측되는 성지가 불연속적으로 남아있다. 특히 정상의 성지내에는 축성의 필수조건인 지름 3m가량의 우물이 남아 있어 군사들의 식수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 또한 정상 일대에는 기와편이 산재해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 규모의 건물이 있었음이 추정된다.
▲인흥군묘 및 신도비(仁興君 墓및 神道碑)
포천군 영중면 양문리 산 18의1에 있는 인흥군묘는 향토유적 28호로 묘역은 여산군부인(礪山郡夫人) 송씨와 합장묘로서 주위에는 기와지붕의 둥근 담을 둘렀고, 호석(虎石)이 돌려진 봉분은 높이 2m, 둘레18.8m다.
묘 앞에는 이수(뿔없는 용모양의 형상)를 올린 묘비, 상석(짐승모양의 석물), 향로석(향로를 올려놓는 돌)이 있고 좌우에는 망주석
[시·군지정 문화재 - 포천] '금강산 가는 길목' 곳곳에 운치
입력 2002-06-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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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6-28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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