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는 국보4호 고달사지부도를 비롯해 60여점에 달하는 문화재와 한글을 창조한 세종대왕을 모신 영릉이 소재하고 있는 등 많은 문화유산과 옛 조상의 발자취가 그대로 살아 숨쉬는 역사의 고장이다. 국가·도지정문화재를 제외하고 일반인에 잘 알려지지 않은 여주 향토유적을 중심으로 소개한다.
■매산서원(梅山書院·향토유적 제10호)
고려말 학자이며 문신으로 전의주부(典儀主簿)·조사의대부를 지낸 삼우당 문익점(1329~1398년)을 제향하는 곳이다.
문익점은 공민왕 12년(1363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에 갔다가 목화씨를 얻어와 장인 장천익과 함께 고향인 강성현(江城縣·경남 산청)에 재배하여 뒷날 한국의 의류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조선 세조때 문익점만을 모신 사당으로 건립되었으나 목은 이색(1328~1396년)과의 교우를 참작하여 후손과 유림에게 이색도 함께 모시도록 하고 서원(書院)으로 승격시켰다.
이후 후손 문겸(文謙)이 병자호란때 사당을 이곳으로 옮겨 세우고 사당각(祠堂閣)을 건립한 이래 춘추로 제향해 왔다.
외삼문(外三門)인 솟을대문 앞에 신성한 구역의 입구를 뜻하는 홍살문이 서있고, 외삼문부터 전체 경내를 담장으로 에워쌌다.
큰 당의 강당은 팔작지붕에 한식 골기와를 얹고 있으며, 정면은 9.78m(3칸)로 좌우에 작은 퇴간 1칸씩을 달았고 측면은 6.6m(3칸)다. 그 위 높직한 대지에는 내삼문이 있어 또 하나의 담장을 시설하고 안에 사당을 세워 '매산사(梅山祠)'란 사액(祠額)을 달았는데 이 안에 삼우당과 목은의 위패를 모셨다.
맞배지붕에 방풍판(防風板)을 달고 한식골기와를 얹었으며 정면은 4.4m(1칸)로 좌우에 퇴간 1칸씩을 붙였고 측면은 3.6m(1칸)로 되어 있어 문화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원호장군묘(元豪將軍墓·향토유적 제2호)
원호장군의 묘는 북내면 장암리 원두표선생묘 뒤쪽에 자리잡고 있는데 부인 상주 김씨와 합장된 봉분 앞에는 비석·상석·향로석이 있고 망주석은 없이 문신석만 양쪽으로 서 있다.
신도비문은 권상하(權尙夏)가 지었다. 조선 중기 무신인 원호(1533~1592년)는 첨지(僉知) 원송수(元松壽)의 아들로 자는 중영(仲英), 본관은 원주다.
그는 김덕수(金德秀)의 문인(門人)으로 경사(經史)에 통달했으며 1567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에 임명됐다. 경원부사로 있을 때는 여진 니탕개(尼湯介)의 침입을 격퇴하는 공을 세웠다.
특히 원호장군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원도 조방장(助防將)이 되어 패잔병과 의병을 모아 여주 신륵사 부근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 그리고 도망가는 왜병을 쫓아 구미포에서 섬멸하여 그 공으로 여주목사겸 경기·강원 양도 방어사로 강원지구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그해 금화(金化)전투에서 왜군의 복병을 맞아 분전했으나 아군의 열세로 전사하고 말았다. 훗날 병조판서와 좌의정에 추증되고 충장이란 시호까지 내려졌다.
■단종어수정(端宗御水井·향토유적 제11호)
조선 제7대 세조(世祖) 3년(1457년) 나이어린 단종(端宗)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될때 남한강을 따라 금사면 이포리에 도착하여 천서리 파사성을 거쳐 대신면 상구리의 이 샘물에서 물을 마시고 갔다고 구전(口傳)되어 온다.
이때부터 이 샘물을 어수정(御水井)이라 불렀다. 현재 샘물은 원형(圓形)에 가깝게 보존돼 있다. 어수정주변을 2단으로 석축했으며 사철에 걸쳐 수량(水量)이 항상 많다. 특히 가뭄에도 물이 줄지 않아 식수는 물론 어수정 일대 전답(田畓)의 농업용수로도 사용된다.
석축의 틈에서 솟아나는 맑은 샘물은 물맛이 좋고 약수(藥水)로도 유명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고 있다. 샘물의 너비는 3.3m이고 둘레 10.1m다.
■길수익효자비(吉壽翼孝子碑·향토유적 제15호)
길수익은 세종대왕 능인 영릉의 수호군(守護軍)신분으로 여주땅 왕기촌(王基村·지금의 왕터)에 살고 있었다. 어느날 그의 부친 옥동(玉同)이 강에서 고기를 낚다가 그만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물가로 나오지 못하자 자신도 물에 뛰어들어 아버지를 안고 함께 익사했다.
이같은 효심이 알려지면서 지방유림 상소로 1627년 나라에서 효자문을 내렸다. 현재의 비각은 1828년에 중건된 것으로 정면·측면 모두 1칸의 규모이며 목조로 단청하고 비각 우측에 당시의 사실을 별도로 기록한 비를 세웠다.
여주
◆ 파사산성
해발 250m의 파사산 정상을 중심으로 축성된 테뫼식 산성인 파사산성은 성벽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 성벽의 총 길이는 935m며 여장(餘墻·성위에 설치하는 구조물)은 허물어져 형태가 남은 것이 거의 없고 남은 성벽중 최고 높은 곳은 6.5m이나 낮은 곳은 1.4m되는 곳도 있다.
파사산성은 있는 천서리(마을)를 향한 쪽의 문을 동문지(東門址), 인근 이포리 쪽의 문을 남문지(南門址)로 불렀고 동문지에는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이중성
[시·군지정 문화재 - 여주] 성현의 향취 머금은 '역사의 고장'
입력 2002-08-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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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8-09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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