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멀리 고구려시대부터 '뻗어 가는 땅' '넓은 땅'이란 뜻의 '잉벌노(仍伐奴)'로 표기했던 시흥시는 현재 서해안시대 중추도시로의 면모를 갖추고 급성장하고 있어 선조들이 지명을 붙인 혜안이 돋보이는 곳이다.

지난 89년 시로 승격한 시흥시는 군시절 지역이 7개시로 분리될 정도로 지역이 넓고 세가 컸던 만큼 국가 지정 보물인 소래산 마애상(磨崖像)과 사적 제413호인 방산동 청자·백자요지 등 중요한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연성금사시첩

시흥의 대표적 문화로 꼽히는 연성문화는 조선후기 전성기를 맞으면서 양주·양평의 화서문화와 쌍벽을 이뤄 화서문화의 기둥이 이항노선생이라면 연성문화는 장유선생의 영향을 받았다.

연성문화는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인 장유가 역신으로 몰려 현재 장곡동 움막집에서 은거하면서 당시 선비들과 시류 논쟁을 벌인 '다락방 문화'가 바로 연성문화의 시효라고 '인조실록'에 기술돼 있다.

이어 고종 14년 경기 서부지역 선비들이 시를 짓거나 시국을 논의하는 등 연성문화의 맥을 이어갔던 기록이 '연성금사시첩(蓮城昑社詩帖)'(죽률동 남양 홍씨 자손보관)에 있다.

연성금사시첩에는 당시 선비들이 장유의 다락방문화를 본받아 제자와 스승간, 회원간의 관습적 도덕률이 엄격하면서도 선비의 도도한 인품과 풍류를 시로 읊으며 교류한 내용이 기록돼 있는데, 이경수·홍재식·박대병·김봉안·윤종선·박상오·유응렬·강영돈 등 40여명의 활동 회원 명단이 있다.

◇태봉(胎封)

일반적으로 태실·태묘 등으로 불리는 태봉은 태반을 묻는 장소를 말하는 것으로 관내에는 모두 3곳이 있었다.

금이동 부근의 태장뿌리 산과 거모동 군자 초등학교 앞, 또 지난 90년 5월4일 시향토유적 6호로 지정된 무지내동 해발 50m 산 정상에 있는 것 등이다.

앞의 두곳 태봉은 파괴되었고 현재 유적으로 보존되는 무지내동 태봉은 깊이 2m에 지름 0.85m 높이 0.47m, 두께 0.16m의 대리석으로 만든 석함을 묻은 조선시대의 태실지다.

태실은 일반적으로 태옹(胎甕)이라하여 항아리에 안치하는 것이 통례이나 왕세자나 왕손 등 다음 보위를 이어받을 인물의 태는 태봉으로 가봉될 것을 감안해 석실을 만들어 보관하였다.

◇생금집(향토유적 제7호)

바닷가에 살던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비교적 충실히 볼 수 있는 자료를 보관하고 있는 생금집은 금녕 김씨 자손이 12대째 살아온 곳.

생금집의 전설은 조선조 말엽 당시 죽률동 597에 살았던 김창관(1845~1929년)이 마을에서 10여 리 떨어진 옥구도에 땔 나무를 하러 가면서 시작된다.

김씨가 우물을 보니(생금우물) 닭 한 마리가 있어 가져다 골방 반닫이에 넣었다.

이튿날 김씨가 반닫이를 열어보니 닭이 모두 황금덩이로 변해 있어 금방에서 돈으로 바꾸어 땅도 사고 새집을 지었는데 이 집이 바로 생금집이다.

그후 소문을 듣고 출가했던 딸이 찾아와 황금닭을 몰래 훔쳐 가다 중간에서 펴 보니 황금닭은 돌 덩이로 변해 있었다.

딸은 순간 황금닭의 주인이 따로 있음을 깨닫고 친정으로 돌아와 반닫이에 넣었으나 다시는 황금닭으로 변하지 않았다.

◇관곡지(향토유적 제8호)

관곡지는 조선전기의 공신이자 농학자로 이름을 떨친 강희맹(1424~1483년)선생이 세조9년(1463년) 중추원 부사로 진헌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던 길에 남경에 있는 전당지에서 연꽃씨를 가지고 와 하중동 관곡 연못에 재배를 시작하면서 유래됐다.

이후 연꽃이 전국에 널리 퍼져 이를 계기로 안산군(1914년 3월1일 시흥군통합)의 별호(別號)를 '연성(蓮城)'으로 부르게 되었다.

관곡지의 연꽃은 다른 연꽃과 달리 꽃의 색은 희고 꽃잎은 뾰족하며 담홍색이다.

이 못은 강희맹의 사위인 권만형(사헌부감찰)의 후손에 의해 관리되어 오고 있다.

연성초등학교와 중학교의 명칭과 연성동 명칭, 시의 대표적인 문화제인 연성문화제의 명칭이 이 못에서 연유됐다.

이외에도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된 김치인선생의 묘와 유적 제2호인 장유선생 묘 및 신도비, 또 유적 제3호로 지정된 하연선생묘와 유적 제5호인 류자신선생 묘 및 신도비, 제6호인 조병세선생의 묘가 시 지정 문화유산으로 시민들과 호흡을 함께 하고 있다.

세번 영의정을 지낸 명재상인 김치인(1716~1790년)의 묘가 안현동 360에 있다.

조선 후기의 문신인 김치인은 우의정 김구의 손자이자 영의정을 지낸 김재로의 아들로 3대가 정승에 오른 인물이다.

조선왕조 4대 문장가로 젊은 시절 장곡동 안골 마을에 은거하면서 '다락방문화'의 시효로 꼽히는 장유(1587~1638년)선생의 묘가 조남동 산1의5에 있다. <시흥>

◆ 소래산 마애상

지난해 9월21일 국가 보물 제1324호로 지정된 소래산 마애상(蘇萊山 磨崖像).

고려 초 최고의 선각미를 자랑하는 최대의 석불 조각이란 찬사를 받고 있는 마애상은 시흥시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소래산의 동쪽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