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시대 내을매(內乙買) 또는 내이미(內爾米)라고 불린 동두천시는 대동지지에는 백제 영토로 기록된 곳이기도 하다.

신라 경덕왕 16년(757) 사천으로 변경, 견성군(현재 포천군)의 영현으로 삼았다가 고려 현종 9년(1081)에 양주에 예속되었고 조선 세조 12년(1466) 1월 관제개정에 따라 양주가 목(牧)으로 승격돼 진이 만들어졌다.

양주 속현으로 견주·풍양·사천이 있었는데 목의 34개 방리중 하나인 이담이 오늘날 동두천시 근원이다.

조선조말 가정자리(조선 영조때 도승지를 지낸 이중경이 벼슬에서 물러나 현 동두천동에 정자를 짓고 정자의 이름을 가정자라고 한데서 유래)라 불리던 동두내(東頭川)에 경원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일제의 문화말살 정책에 의해 고유명칭이 동두천리로 바뀌었다.

이는 동쪽에 근원을 두고 냇물이 흘러 붙여진 이름이며 40여년전까지만 해도 동두내라는 명칭이 잔존해 있었다.

현재 동두천(東豆川)으로 표기되는데 가운데 두(頭)자가 두(豆)자로 변한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며 1950년대로 추정될 뿐이다.

7개동에 걸쳐 11개 향토유적이 산재해 있으며 10개유적은 지난 86년, 나머지 1개는 지난 98년에 향토문화재로 지정됐다. 시대사별로는 신라~고려말~조선시대로 이어진다.

#사패지 경계석
향토문화재 제1호로 지정된 이곳은 조선초 무신 어유소(魚有沼·1434~1489)장군이 1488년 국왕 성종과 함께 어등산에서 사냥을 하다 화살로 솔개를 맞혀 떨어뜨린 지점이다. 어장군은 동두천 일대를 사패지로 하사받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비를 세웠다.

#동점마을 암각문
동점마을 입구 하천변 바위에 '일이삼사 육칠팔구 황중원길'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오행설에서 유래된 이 암각문은 이 마을이 우리나라 중심지이며 여러마을 가운데 가장 길지로서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 글씨는 토정 이지함이 새겼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옛 생활풍습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사학자로부터 평가받고 있다.

#목행선 선생 묘
지행동 산11의1에 소재한 이 문화재는 조선 인조때 문신인 목선생이 인조 14년 경기도도사로 재직시 곤궁에 빠진 백성들을 보살피는 선정을 베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후 효종 4년 황해도 관찰사를 지내면서 이곳에서도 민심을 보살폈고 1655년 승지로 영전했다. 묘앞 중앙에는 묘비·상석·향로석과 망주석을 갖췄다. 높이 133㎝인 흰 대리석 묘비에 씌어진 비문은 미수 허목선생이 지었다.

#홍덕문 선생 추모비
홍덕문은 구한말 애국지사로 이름은 병준이며 1864년 10월 1일 걸산동에서 태어났다. 홍선생은 1919년 3월1일을 기점으로 1천여명의 군중을 이끌고 만세운동을 하다 일본경찰에 체포돼 고문을 당했다. 일제의 억압에도 굴하지 않은 홍선생은 석방후 1923년 5월17일 일본경찰이 가한 형독(刑毒)으로 사망했다. 이후 선생의 빛난 얼을 되새기고 그 기개를 후세에 전하고자 지난 75년 시민성금을 모아 추모비를 세웠다.

#어유소 장군묘 및 신도비
어장군(1434~1489)은 조선초기 무신으로 세조 2년 무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북방 야인 정벌에 큰 공을 세웠고 이시애가 반란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난이 평정되자 적개공신 1등으로 예성군에 봉해졌고 공조판서를 제수받았다. 성종 10년 명나라가 건주위를 정벌할 때 서정대장으로 출정했으나 만포진에서 회군한 죄로 한때 유배생활을 하다 풀려나 오위도총관·이조판서까지 지냈다. 1489년 성종이 무예를 강습하던중 경기도 영평 함정현 활터에서 요절한 어장군에 대한 이야기는 세조·예종·성종실록과 국조인물고 등에 전해진다. 신도비는 옥개가 화고간석으로 조각된 것이 특징이며 전액은 정장공신도비명이다. 비의 앞·뒷면 비문은 어세겸이 글을 짓고 안침이 썼으며 규모는 높이 158㎝ 폭 68㎝ 두께 20㎝다.

#자재암
소요산 중턱에 자리잡은 자재암은 신라 선덕여왕 14년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전해오고 있다. 고려 광종 25년 왕명으로 각규대사가 중창했으며 1153년 화재를 당해 이듬해 각령선사가 대웅전과 요사 일부를 중건했다. 1872년 원공선사와 제암화상이 퇴락된 이 사찰을 44칸 건물로 복원하고 영원사라 개칭했다.
1907년 정미의병때는 의병활동 근거지인 탓에 소실되기도 했으나 제암의 제자 성파스님이 복원한 뒤 오늘의 자재암으로 개명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다시 폐허가 돼 지난 61년 대웅전, 71년에 요사, 74년 포교당과 원효대, 77년에 삼성각을 건립했다.

#삼충단
삼충단은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항거하며 단종의 복위운동에 가담했던 민신·조극관·김문기 등 세 충신의 호패비를 모신 곳이다. 곡담안에 있는 대리석 호패비들은 각각 높이가 67㎝ 폭 28㎝ 두께 10㎝며 삼층단 규모는 정면 9.6㎝ 측면 7.2㎝다. 1932년 9월 김문기 후손 김항권이 양주 유림의 협조로 세웠으며 해마다 봄·가을 종정일을 택해 제사를 지낸다.

◆ 탑동석불

동두천시 탑동동 503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