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천군은 경기도 동북쪽 끝에 위치해 있으며, 한반도 허리부분에 해당된다.

이런 까닭에 사회·문화적 측면에서도 북부와 남부의 점이지대를 형성하는 동시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으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다.

삼국시대부터 임진강을 통해 서해교역에 유리한 입지조건을 차지, 남방진출을 노리던 북방세력과 이를 제지하려는 세력이 패권을 다투던 변방이기도 했다.

때문에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 조선 초 연천인구는 360명으로 지금과 마찬가지로 도내에서 가장 인구가 적은 현이었으며, 성종실록에는 영평·철원·평강·연천은 인적이 드물고 억새풀이 들을 덮었다고 기록돼 있다.

삼국중 가장 먼저 이 지역을 차지한 세력은 백제였고 이후 정치·행정적인 변화가 계속됐다. 백제의 공목달(功木達)로 시작된 이 지역이 오늘날 연천(漣川)이라는 지명을 얻게된 것은 고려말 1309년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당시 9주 5소경 지방행정제도에 따라 한주(漢州)에 속했고 궁예가 철원을 중심으로 태봉을 개국했을 때는 이 세력권에 포함되었다.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개성을 본거지로 고려를 건국하면서 연천은 수도배후지 역할을 담당했다. 또 고려말 사회적 혼란과 왜구침입이 극에 달해 개성 근처까지 미치자 1377년 우왕때 철원과 함께 연천이 천도후보지로 거론됐으나 궁궐터를 답사한 숭경부윤 진영세가 오역의 땅이라고 보고해 후보지서 삭제됐다.

조선 태종때 현감이 파견된 이래 이곳은 마전·삭령·적성·철원·양주·파주·포천등 인근 군·현과 여러번에 걸친 통폐합 과정을 거쳐 현재 행정구역은 2읍 8개면이다.

●연천향교(향토유적 제2호)

연천읍 차탄리 345에 소재한 연천향교는 1407년 태종 7년에 창건돼 효종 9년 1차 이전하고 한국전쟁 이후 재건과 이전 등 3차에 걸쳐 개·보수 됐다.

건립당시는 대성전·명륜당·신문·창고등 5개동이 존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현재는 대성전, 명륜당, 동·서재, 내·외삼문등 6개동 건물로 구성돼 있다.

대성전에는 중국의 5성위와 송나라 2현,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제향기능은 전래되고 있으나 과거 교육기관으로서의 구실은 이어지지 않고 있다.

현재 건물은 원래 것이 아니나 이 지방에 바탕을 둔 유림의 뿌리와 학문적 사상을 높이 평가하여 지난 86년 4월 향토유적으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임장서원(향토유적 제12호)

국도 3호선에서 연천 읍내로 들어서는 갈림길 삼거리에서 도로 우측 구릉정상부에 있는 남향 건물이다. 이 서원은 임계중(1418~1544년)이 을묘사화때 정계를 은퇴하고 낙향하여 주자학을 연마하던 것을 그 모태로 한다. 이후 숙종 26년 주자서원을 창건, 주자의 위패를 모셨고 숙종 39년 임장(臨●)으로 개칭되었다.

당시 경내에는 사우, 강당, 동·서재, 전사청등 부속건물이 있었는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손되었고 한국전쟁때 건물 일부만 남았던 것을 지난 98년 복원했다. 복원된 서원은 남향하여 삼문을 내고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 대성전을 갖춘 목조 맞배지붕으로 건축되어 있다. 복원과정에서 기존 서원유지는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남쪽 경작지면에 원래 구조물로 여겨지는 석재와 기와 등이 남아있다.

●양원리 지석묘(향토유적 제3호)

전곡읍 양원리 408의1에 소재한 이 지석묘는 크기가 990×980㎝이며 탁자식이다.

지난 94년 인근 거성섬유 대표 곽효일(56)씨가 자비를 들여 복원 정비했으나 도중 일부가 유실됐다. 축조형식은 장방형 반석 4개로 지석을 세워 석실을 만들고 그 위에 화강암 개석을 올렸다.

현재 개석은 지석의 심한 불균형으로 북서방향으로 크게 기울어져 있다.

장축은 남서~북동 20도 정도며 편방형 형태에 380×340×46㎝ 규모다. 개석은 전면에 치석을 가하였는데 상부면은 비교적 세밀한 편이며 하부는 절리 형태다. 동서쪽에 가로놓인 지석은 검붉은 변성암으로 조성된 것으로 심하게 파손된 채 원래 자리에서 이탈된 형태며 대체적으로 내측은 간결하고 외측은 정연한 자세다. 마구리벽 남쪽은 유실되었으나 자연석을 이용했다.

●남순하 효자문(향토유적 제8호)

남순하(1694~1776년)는 숙종 20년에 출생했다. 그는 병환중인 아버지를 위해 겨울 눈덮인 산속을 헤매며 고사리를 찾아 병환을 낫게 하였으며, 얼어붙은 강을 깨고 잉어를 잡아 부모를 봉양하는 등 극진한 효행을 보였다고 전한다. 이런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영조의 명에 의해 효자문이 내려졌는데 원래의 것은 한국전쟁때 소실되고 전후 후손들이 복원했다.

소재지는 전곡읍 간파리 212이며 정려문은 정면 2칸, 측면 1칸 맞배지붕을 한 정려각 안족에 세워져 있고 좌측의 것이 남순하 효자문, 우측은 남순하의 손자 남업의 처 열녀문이다.

●낙선군 이숙의 묘(향토유적 제1호)

낙선군(1641~1695년)은 인조와 귀인 조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출생하였으며 휘는 숙, 자는 자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