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악사지
관악사지는 지난 1993년 단국대학교 사학과에서 과천시 일원에 대한 문화유적 지표조사를 하던 중 발견됐다.
발견당시는 정면에 석축을 갖춘 4곳의 건물지와 무너진 석종형 부도 1기 및 샘이 확인됐을 뿐 정확한 창건시기, 존속시기등 역사적 성격은 규명되지 못한 채 등산객들의 무심한 눈길만 받았다. 창건시기 등의 확인이 가능하게 된 것은 1999년 7월6일 관악산 정상부에서 남동쪽에 자리한 관악사지의 발굴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부터다.
단국대학교 매장문화재연구소가 주축인 발굴단은 가~마지구 등 5곳으로 나눠 작업을 진행, 가지구 지표 50㎝ 지점에서 면을 다듬은 장대석재가 노출됐고 나지구에서도 초석하부 및 건물 온돌시설로 보이는 석재가 모습을 드러내는 등 5개월간에 걸친 발굴작업을 무사히 끝냈다.
관악사지는 발굴조사를 통해 총 10개의 건물이 들어서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 건물이 들어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평탄지의 규모는 남북 30m 동서 15m로 경사지를 석축으로 쌓아 단을 형성하며 지어졌고, 이같은 건물지의 상황으로 미뤄 전성기에는 상당한 규모를 지닌 사찰이었던 것으로 추정됐다.
또 출토된 자기편을 통해 15세기에 창건돼 18세기까지는 법등이 이어졌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연주암과 관악사의 연관성이 없다는 점이 지적돼 주목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연주암은 관악사의 3차 중창시 효령대군이 현재 위치로 옮겨 40간의 가람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연주암에는 효령대군의 초상화가 모셔져 있어 이 기록의 신빙성을 높여 주었다.
그러나 연주암의 3층석탑과 연주대의 마애약사여래입상이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반면 관악사지는 발굴조사 결과 고려시대 유물은 한 점도 출토되지 않았다. 이같은 사실로 미뤄 연주암과 관악사는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더라도 독립된 사찰이란게 조사팀의 견해다.
관악사지에는 사적가치가 높은 유물이 대량 발견됐다. 이중 수막새와 암막새 모두 회청색 내지 회흑색을 띠는 소성도가 높은 경질인 점이 조선시대 막새의 전형을 보였다.
막새의 문양이 봉황문과 용문이란 점에서 왕실과 상당한 연관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자기류는 고려시대 청자는 볼 수 없는데 반해 분청사기와 백자가 주종을 이뤘다.
# 일명사지
국사편찬위원회 뒤편 산아래 있는 백운정사를 지나 계곡의 동편을 따라 개설돼 있는 등산로를 오르다 보면 약수터가 나온다. 약수터서 동쪽 바위 경사면으로 조성된 길을 5분정도 가다보면 일명사지가 나타난다.
발굴당시는 건물지의 흔적은 간 곳 없고 수목만이 우거져 도저히 사지라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현재 남아있는 길이 25m 높이 1~2.8m의 석축만이 예전에 사찰이 있었던 곳이란 짐작이 가능할 정도였다. 그러나 발굴해 가는 과정에서 일명사지가 통일신라 하대에 창건돼 17세기 후반이나 18세기 초까지 오랜 세월 사찰로 존속했던 것으로 하나둘씩 베일을 벗기 시작했다.
석조유물로는 2점의 연화대석과 석탑지대석 2점, 석탑탑신석 1점, 석탑상륜부재인 5개체의 보륜등이 나왔고 분청사기·백자를 비롯 용도를 알 수 없는 철편도 5점이 출토됐다. 특히 통일신라시대 조성됐다는 결정적인 단서인 승문기와, 무문의 소와, 사선문기와, 나와등 명문기와도 함께 나왔다.
# 용운암마애승상군
정부 과천청사 뒤 백운정사 20m 앞쪽에서 오른쪽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산등성이를 넘으면 높이 170㎝ 가로 200㎝의 북동향 바위가 있다. 바위에는 다섯분의 스님얼굴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것이 용운암마애승상군이다. 조각이 있는 바위 입구에는 2개의 기둥형 바위가 있어 마치 문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근래에 조각한 것으로 보이는 소림문에는 금가울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스님의 얼굴은 위쪽 3구, 중간 2구가 있는데 모두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이다. 바위 아래쪽의 규모가 작은 스님 얼굴 2구는 근래에 조각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 나라 마애불은 대부분 부처모습이고 정면상을 하고 있는데, 이곳은 측면상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 효자 최사립
최사립 정려판의 규모는 263×27×3.5㎝이며 '효자통훈대부행 배천군수 최사립지문'이라 쓰여 있다.
최사립은 조선 중종때의 효자로 본관은 전주이며 자는 입지이다.
한성 부윤을 지낸 사위의 5세손으로 조선 연산군 11년(1505년)에 과천현 막계리 음달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최결이며 왕실 친척의 친목을 위한 일을 맡아보는 관청에서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다.
그는 첫 아들의 탄생을 무척 기뻐하면서 아들 이름을 '바로 서는 이'라는 뜻의 사립이라고 지었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했던 최사립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커다란 슬픔이었다. 산소옆에 막을 짓고 어머니를 생각하며 3년동안 아침 저녁으로 밥을 올렸다.
그러던 어느 겨울 아버지마저 병석에 눕게 되었다.
아버지가 칡꽃이 먹고 싶다고
[시·군지정 문화재 - 과천] 都城관문 600년역사 고이 간직
입력 2002-1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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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1-01 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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