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명시는 철산동과 가학동에서 지석묘가 발견돼 청동기시대 이전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 초에는 백제의 수도인 위례성 근처 한강유역에 있어 백제의 영토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고구려의 남진으로 장수왕때 고구려 영토가 됐다. 그때의 지역은 잉벌노현이었으며 신라가 통일한 후 경덕왕대에 곡양현으로 바뀌었다가 고려때 이르러서는 금주로 불렸다.

조선시대에는 태종 13년(1413년)에 전국적인 지명 개편으로 금천으로 명칭이 변경됐으며 이후 정조 19년(1795년) 시흥현의 명칭을 사용하면서 시흥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고종 32년(1895년) 군제의 실시로 시흥군이 됐으며 1904년 서면이 이후 남면이 생겼다.

광명시의 전신인 시흥군의 남면과 서면은 1913년 12월29일 공포되고 다음해 3월1일부터 시행된 총독부 부령 제111호에 따라 남면이 서면에 흡수 통합됐고 리 역시 대폭적인 변혁이 이뤄졌다.

▲철산동 지석묘(향토유적 제1호)

거석숭배(巨石崇拜) 신앙의 흔적을 나타내고 있는 청동기시대의 묘제 또는 제천단(祭天壇)으로서 예배의 기능을 가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석실 하부구조는 적석(積石)시설을 갖추고 있는 강화군 삼거리 제3호 지석묘와 비슷한 형식이다. 개석은 치석(治石)한 흔적이 많으며 장축인 동·서 길이는 292㎝, 남·북 길이는 72~88㎝의 규모다. 동·서 마구리돌은 빠져나가 없고 남·북 지석이 개석을 떠받치고 있다.

남쪽 지석 길이는 165㎝ 두께 40㎝ 지표에 노출된 높이는 49㎝ 정도다.

지석묘 발굴당시 석실내부의 흙속에는 기와편·백자편·청자편·잡석 등이 뒤섞여 있었는데 이는 본래의 모습은 아니고 후대에 교란됐던 것으로 추측된다.

지석묘의 원래 위치는 철산동 462의33으로 민가가 들어선 지역이었으나 도시개발 사업지구로 지정되면서 지난 1985년 1월 한양대학교 박물관에 발굴·이전·복원작업을 의뢰, 인근 광명고등학교 교정입구로 이전했다.

이후 학교 교실의 부족으로 교사증축이 이뤄짐에 따라 시정조정위원회의 심의 의결을 거쳐 1990년 8월 현재의 시민회관 영내로 이전 관리해오고 있다.

▲정원용 묘(향토유적 제2호)

광명시 노온사동에 위치한 묘는 정경부인 강릉 김씨와 합장돼 있으며, 묘앞에는 묘비와 상석·향로석이, 좌우에는 망주석이 갖춰져 있다.

묘비는 화강암비석에 옥개(屋蓋)를 얹었으며 앞면에는 '유명조선국 의정부영의정시문충 동래정공 휘원용묘배정경부인강릉김씨부좌'라고 새겨져 있다.

비문은 맏아들인 의정부 우찬성 기세가 짓고, 글씨는 손자인 홍문관 부제학 범조가 썼다. 비문 말미에 '상지(上之) 13년 병자(丙子)월 일 입(立)'이라는 음각으로 보아 고종 13년에 건립됐음을 알수 있다.

당시 그가 입었던 의대와 그의 가문 선대·후대의 유품 등이 중요민속자료 제13호로 지정돼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정원용(1783~1873년)은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선지(善之), 호는 경산(經山), 본관은 동래다.

순조 2년(1802년) 정시문과 을과로 급제한 후 가주서(假注書)·검열(檢閱)·부응교(副應敎) 등을 거쳐 이조참의·대사간·관서위유사(關西慰諭使)·강원도관찰사 등의 벼슬을 역임했다.

순조 31년(1831년)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예조·이조판서를 거쳐 헌종 3년(1837년) 우의정·좌의정·판중추부사·총호사 등을 지냈고, 철종 13년(1862년) 궤장을 하사받았다.
 
1863년 철종이 승하하자 원상(院相)이 돼 고종이 즉위할 때까지 국정을 관장했고, 이듬해에는 실록청 총재관으로 '철종실록'의 편찬을 주관했다.

고종 10년(1873년) 91세를 일기로 타개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는 '경산집(經山集)' '황각장주(黃閣章奏)' '북정록(北征錄)' '수향편(袖香編)' '문헌촬요(文獻撮要)'등이 남았다.

▲이순신 묘(향토유적 제4호)

묘는 광명시 일직동 산 26의7에 있으며 2m가량의 낮은 봉분과 일부 석물들이 세월의 풍상으로 훼손돼가고 있다.

봉분의 앞면은 1.6m와 2m 두개의 장대석으로 호석을 둘렀고, 측면은 3개의 장대석으로 4m가량 둘려 있는데, 호석의 형태로 보아 정사각형의 묘제에 가깝다. 묘의 둘레는 3.4m, 묘의 앞면 호석 아래로는 일렬로 9.3m의 장대석 기단을 마련해 놓았다.

묘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문방석, 좌·우에는 망주석·문인석이 배치돼 있다. 그러나 왼쪽 망주석은 하단이 파손된 상태며 문방석의 앞면과 좌·우에는 문양이 조각돼 있다.

본래 묘 전면에는 허목(許穆)이 지은 묘갈이 서 있었는데 현재는 망실돼 전하지 않고 있다. 이순신(1554~1611년)은 조선 중기 선조때의 무신으로 자는 입부(立夫) 본관은 전주(全州)로 양녕대군의 후손이다.

선조 11년(1578년)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선전관)·온성판관(穩城判官)·의주판관(義州判官) 등을 거쳐 혜산진 첨절제사가 됐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방답진 첨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