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시는 고구려 때 매홀군으로 불리다 통일신라시대 757년(경덕왕 16년)에 수성군이라 개칭했다. 고려시대인 934년(태조 17년) 수주로 승격했으며 995년(성종 14년)에는 도단련사를 두었다.
이후 1005년(목종 8년)에 폐지했으며 한남 또는 수성이라 부르기도 했다. 1018년(현종 9년)에는 수주지사를 두고, 1271년(원종 12년)에 도호부로 승격하면서 수원이라 개칭했다. 1310년(충선왕)에 부로 격하됐다 1362년(공민왕 11년)에 다시 군으로 강등된 후 3년뒤 부로 환원됐다.
조선시대인 1394년(태조 3년) 한양 천도와 더불어 양광도에서 경기도로 편입됐으며, 1413년(태종 13년)에 다시 수원도호부가 되고 1456년(세조 2년) 진을 설치해 판관을 배치했다. 1789년(정조 13년) 정조는 아버지 장헌세자의 묘소를 양주에서 수원 화산으로 이장하고 화산에 있던 읍치를 팔달산 밑으로 옮겼으며, 1794년 화성(수원성)을 착공해 1796년 완공했다. 1896년(건양 1년) 수원군이 되고 경기도 관찰부소재지가 됐다가 1910년 서울로 옮겨졌다. 그후 1931년 수원면이 읍으로 승격하고 1949년 수원시로 승격되면서 나머지 군역이 화성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2000년 오산에 있던 화성군청사를 현재의 남양동으로 신축 이전했고 2001년 시로 승격됐다.
#안곡서원은 조선 현종 7년(1616년) 남양현감으로 부임한 민노중이 기묘명현인 도원제 박세희의 유풍을 숭모하여 현위치에 안곡서원을 창건하고 그의 위패를 봉안·향사한 것이 그 유래다. 그 뒤 현종 9년 도원제의 백형으로 역시 기묘명현인 송촌 박세훈을, 숙종 23년(1697년)에는 남양 유생 한덕봉외 150여명의 진장으로 인재 홍섬을 추배·봉사하였다.
경종 1년(1721년)에는 안곡서원으로 사액됐으나 영조 5년(1729년) 첩설서원 철폐때 철폐됐다 영조 16년(1740년) 남양 유생들이 비첩설서원임을 상소하여 복액되었다. 그러나 고종 8년(1871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된 후 1976년 유림들에 의해 사자(祠字)를 중건, 3인의 위패를 봉안하게 되었다.
#최루백 효자비각은 고려 의종때 최루백의 효행기를 기리기 위해 건립돼 봉담읍 분천리 산 97에 위치해 있다. 원래의 비각은 봉담읍 수기리에 위치해 있었다 하며 현 위치 일대가 최루백의 사패지였다고 한다.
현재의 화강암 정려비는 조선 숙종때 세워진 것으로 고려사열전·세종실록지리지·삼강행실도·동국여지승람·오륜행실도뿐 아니라 중국의 해동금석원에서도 실려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본관은 수원이며 호장을 지낸 수원 최씨 시조 최상저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하고 의종때 기거사인에 올랐다. 그후 정언·죄우사간·예부낭중 등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의종 7년(1153년)에는 금나라에 가서 용흥절을 축하하고 돌아왔다.
#이곤선생 효자문 본관은 원주이며 과의교위공 한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문과에 급제한 뒤 병조정랑·선령·보령·옹진·음죽 등의 현감을 지냈으며 외직에 재임하면서도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고 한다.
부모가 노환으로 병석에 누워 추운 겨울날 잉어와 오이가 먹고 싶다고 하자 이곤은 백방으로 노력을 다했다. 이곤의 지성에 천지신령도 감동한 듯 마침내 강의 얼음 속에서 잉어를 구할 수 있었고 깊은 산 속의 덩굴에 매달려 있는 오이를 얻어 부모를 공경했다고 한다. 그의 극진한 효성은 나라에까지 알려져 영조 13년(1737년) 왕후로부터 효행상과 효자정문을 하사받았다고 전해오며 현재 정문안에 걸린 현판은 고종 20년(1883년)의 것으로 효자정문은 이때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금산사는 1912년 김해 김씨의 모금으로 선조인 신라의 명장 김유신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사우로서 신라의 유학진흥과 국학발전에 공헌한 최치원의 위패도 함께 배향·봉사하고 있다. 사당은 정면 6.5m, 측면 2.2m의 규모로 3문의 좌우측에는 1985년 화강암으로 기품있게 석축한 기와를 올린 담장이 이어져 사당 주위까지 둘러져 있다.
#수촌리 교회가 처음으로 개설된 것은 1905년 교인 김응태의 주도로 당시 정창하의 집에서 7명이 모여 예배를 본 것이 효시다. 1907년 초가 15칸을 매입, 예배당으로 사용해 오다가 1919년 3·1운동 당시 만세사건으로 일본경찰이 마을 전체를 방화했을때 전소되었다. 그러나 1922년 4월 당시 아펜젤러와 노블의 협조로 8칸의 초가 예배당을 마을에 건립, 사용해 오다가 1932년 1월 수촌리로 이전 현 교회의 위치가 됐다.
이 외에도 화성에는 홍담효자각, 한명윤·박행장 충열각, 박장철효자각, 홍한묘역, 최윤식 기념비문, 남양홍씨 열려정려문 등 다수의 향토문화재가 존재해 있다.
◆ 전해내려오는 '최백루 효행'
최루백은 100살을 넘게 살다 1205년 12월 사망했다.
최루백의 나이 15세때 그의 아버지 최상저는 수원의 호장으로서 성품이 어질고 재주가 있어 활쏘기에 능해 틈이 있을 때마다 사냥을 즐기는 편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사냥을 하다 호랑이에게 봉변을
[시·군지정 문화재 - 화성] 발길닿는 곳마다 짙은 '孝의 향기'
입력 2002-1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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