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퇴'와 '사오정'으로 대변되는 40대지만 그래도 40대 장년층은 세대간 차이를 메워주고 균형을 잡아주는 든든한 기둥의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40대 장년층들의 목소리는 늘 우리 사회를 이끄는 시대의 여론으로 존중받았다.
 
이제 격동하는 현대사의 한가운데서 피끓는 청년시절을 보냈던 경인일보가 어느덧 40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우리 사회의 든든한 장년층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1960년 창간 이래 독자들의 성원과 격려속에 튼실한 청년언론으로 성장했던 경인일보는 1980년대 군사독재정권 아래서 마치 방황하는 청년처럼 언론으로서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흔들린 적도 있었다. 1990년대 말에는 때마침 불어닥친 IMF 한파로 인해 '일보전진'을 위한 '이보후퇴'의 길을 걷기도 했다.
 
하지만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본보는 매년 눈부신 도약의 길을 걸었다. 잇따른 특종과 기획보도로 한국언론재단과 한국기자협회가 수여하는 한국기자상은 물론 우리나라 언론 사상 최초로 이달의 기자상을 3회 연속 수상하기도 했다.
 
또 한국신문협회, 한국기자협회, 언론노조 등 각종 언론관련 단체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면서 언론의 사명을 지켜왔고 언론개혁을 위해 스스로에 대한 채찍질도 서슴지 않으면서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했다는 평가다.
 
◇흔들림없는 바위처럼(창간~1990년대)
 
경인일보는 지난 1960년 9월 인천시 중구 사동에서 '인천신문'으로 창간하면서 경기·인천지역 최초로 언론의 씨앗을 뿌렸다. 이후 경기연합일보, 연합신문, 경기신문 등 몇차례의 제호변경을 거쳐 지난 1982년 경인일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이 과정에서 인천에서 수원시 교동으로, 그리고 현재의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으로 사옥을 옮겨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격동의 시대를 거쳐온 만큼 본보가 걸어온 길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5·16쿠데타 직후에는 3개월간 검열을 받는 수모를 겪었고 10·26사태 이후 5공화국 아래에서는 정권찬양 기사가 하루도 빠짐없이 등장하는 '시련'을 감내해야 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특종과 기획을 통해 기본에 충실한 언론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1964년 인천 부평에서 발생한 콜레라를 비롯해 파월장병 유가족 위문품 바꿔치기와 실미도 사건 등 시대가 낳은 역사적 사건들을 특종 보도했다. 또 80년대 용인 오대양 신도 집단 자살사건을 비롯해 95년 인천 북구청 세무비리 사건, 99년 안산 관장약 투약 사건 등으로 잇따라 한국기자상을 수상했다.
 
참신한 기획보도를 위한 본보 취재진의 발길은 경기도와 우리나라는 물론 해외로까지 뻗어나갔다.
 
지난 90년대말 중국 본토와 만주, 러시아 지역 등에서 선조들이 벌였던 항일투쟁유적지를 기획취재 보도한 '그 魂, 그 발길따라', 백제의 뿌리와 문물이 어떤 과정과 방법을 통해 일본으로 전달됐는지를 취재, 보도한 '한성백제 5백년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는 지방신문의 한계를 뛰어넘는 기획으로 평가받았다.
 
권력층의 투기 의혹을 생생히 고발한 '말 많은 땅, 땅, 땅'시리즈나 국내 언론계에서는 최초로 지난 1997년 보도한 '개펄을 살리자'시리즈는 우리 사회를 충격속에 빠뜨린 일대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뉴 밀레니엄 시대에 맞춰(2000년~현재)
 
본보의 특종 행진은 새로운 백년에 들어서도 계속됐다.
 
특히 지난 2002년 6월 '경기대,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 등 줄대기 교수 임용' 비리 보도를 시작으로 7월 '의정부 여고생, 미군 장갑차 사망사고' 보도, 8월 '사라지는 희귀식물' 보도까지 이달의 기자상을 3회 연속 수상했다. 이가운데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사망사건 보도는 같은해 제34회 한국기자상 지역취재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다.
 
특종 행진은 이듬해에도 이어져 2003년 2월 '단국대 용인캠퍼스 이전부지 투기의혹'보도에 이어 4월 '공장 난개발 광풍-난도질 당하는 국토', 5월 '화성 동탄 신도시 시범단지 사업자 선정 특혜 의혹'보도로 또다시 이달의 기자상 3회 연속 수상을 기록했다.
 
한국기자협회와 한국언론재단이 수여하는 이달의 기자상을 2년 연달아 3개월 연속 수상하기는 우리나라 언론 사상 처음인 대기록이다.
 
이같은 특종행진과 함께 언제 어디서나 독자들이 쉽게 접할수 있는 하드웨어도 계속 '업그레이드'됐다. 2003년에는 기존의 한문 제호대신 한글제호를 채택하는 등 독자들의 눈높이를 고려한 맞춤 서비스를 시작했다. 특히 지난 1998년 경기·인천지역 일간지 가운데 처음으로 인터넷 홈페이지를 개설한 본보는 창간 44주년을 맞은 2004년도에 온라인상의 다양하고 획기적인 시도를 단행했다. 우선 올 1월 홈페이지를 전면 개편, '피드백'기능이 결합된 다양한 콘텐츠를 갖춰 철저한 이용자 편의위주의 홈페이지로 탈바꿈했다
 
◇대한민국의 미래와 함께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일본 위정자들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