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항 전경

>51< '상권수호' 서상빈

   지난 24일, 인천 중구 자유공원에서 바라본 인천항은 서해 제일의 무역함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대형 화물선이 바쁘게 드나들고 있었다.

   인천항이 세계 각지의 수·출입 화물선이 대형 항구로 자리매김한지는 오래됐다. 과거 이곳은 인근 주민들이 낚시를 하는 어촌 포구에 지나지 않았다. 작은 어촌마을이 지금과 같이 항구로 변모된 과정에는 우리의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지금은 우리 경제를 이끄는 중추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지만 과거 이곳은 외세에 의해 강제로 항구를 열 수밖에 없었던 아픔의 현장이었다.

   인천항 인근에 남아있는 일본식, 중국식의 주택과 과거 일본제일은행 건물 등 개항기 건축물에서는 당시 외세의 압박과 그에 대응했던 한국인들의 아우성이 묻어난다.

   인천항이 개항된 그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123년전인 1883년. 1876년 강화도에서 조·일 수호조규가 체결된 후 일본은 인천에 대한 개항을 요구했다. 이에 조선은 인천이 수도에서 가까운 해안의 요충지인 점을 들어 거부했지만 결국 인천 개항은 이루어지고 말았다.

   일본의 강요에 의해 개항된 이상, 외국 상인들의 치외법권지대가 된 인천항은 각국의 영사의 영향력이 미치며 외부 세력에게만 각종 혜택이 주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상인들이 살아남기에는 상인 개개인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지금도 기업들의 경영상 어려움을 해소하고 권익을 대변하기 위해 대한상공회의소가 존재하듯, 그 시절의 상인들도 외세의 힘에 맞설 조직 구성이 시급했다.

   자연히 상인들의 힘을 모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났고, 이것을 주도한 역량있는 인물이 바로 서상빈이다. 서상빈은 1897년 조직화되지않은 객주들의 모임(인천 객주회)을 모체로 인천신상협회를 조직했다.

   그는 일제의 강요로 개항된 무역시장에서 우리 상인들의 권익을 위해 힘쓴 인물이지만 오히려 인천의 역사는 그를 제대로 기록하지 않고 있다. `위대한 인천인물'을 인천이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서상빈에 대한 흔적을 찾기 위해 후손을 찾아봤지만 이조차 쉽지 않았다.

   서상빈의 4대손인 서민석 동일방직 회장측을 통해 서상빈에 대한 자료 여부를 물었지만, 동일방직 측에서는 “회장의 증조부이고 너무 오래 전 분이라 회장님과 회사 내부에 그에 대한 사진이나 자료는 없다”고 말했다. 인천시나 인천상공회의소 등의 기관이 적극 나서 `잃어버린 서상빈'을 찾아내야 한다는 지적이 설득력을 얻는 대목이다.


   조우성 인천향토사 연구가는 “서상빈에 대해서는 신상협회와 인천 최초의 사학인 제녕학교의 설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일면에 대한 기록만 있다”며 “그에 대한 전문 연구자가 없어, 그의 태생과 죽음 등 삶의 전반에 대해 알기에는 미흡하다”고 밝혔다.

   다만 `대한상공회의소 100년사’에서 상공회의소의 모체가 된 신상협회의 설립에 대한 기록과 `인천석금’에서 그가 제녕학교를 세운 과정의 일부분에서 그에 대한 일면을 그려낼 수 있다.

   서상빈은 학식을 가진 양반인 진신(벼슬아치)으로, 성균관 진사에 올랐다. 상인이 아니었던 그가 상인단체인 신상협회를 설립한 독특한 이력이 눈길을 끄는 것이다.

   신상협회 창립문에는 `서양조합을 본뜨고 회사를 조직하니 진신과 민상이 합하여 상업의 규모를 일신하고 상권을 주장하게 되어 외국인에게 사기당하지 않고 그들의 매점에 이익을 갈취당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밝히고 있다. 외세에 맞서기 위해 학식을 갖춘 지식인의 역할이 필요했고 서상빈이 그것을 충족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서상빈은 부산항에 있는 일본 제일은행에서 불법적으로 은행권을 발행하는 것을 비판하고 일본 재정고문의 화폐개혁으로 생긴 국내의 금융공황에 대한 건의를 하는 등 일본 상인들이 국내 경제를 침탈하는 것에 대응했다.

   따라서 서상빈이 상인단체를 이끈 것은 단지 상인 개인의 이익을 넘어선 애국적 활동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서상빈의 인생에선 인천 최초로 사립학교(제녕학교)를 설립한 대목을 빼놓을 수 없다.

   고일 선생의 `인천석금’에는 제녕학교 설립 과정이 언급돼 있다. 서상빈은 인천이 국제 무역항이자 서울의 관문이란 것을 알고 인천에서 신학문과 영어를 가르치는 인재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 학교를 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생을 가르칠 학교가 없는 것을 고민하던 중, 러일전쟁 초기 침몰한 러시아 군함을 인양해 큰 돈을 번 김정곤씨의 협조를 얻어 초가 30여평의 건물에 학교를 건립했다고 한다.

   그는 주간에는 일반 보통학교 수업을 하고 야간에는 영어 수업을 진행했다. 인천외국어학교 출신인 인천세관 관리 30여명이 교대로 영어와 신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고 일본이 득세하면서 제녕학교는 극심한 경영난으로 1907년 6월 1일 창영초등학교 전신인 인천공립보통학교에 흡수됐다.

   서상빈은 일제의 압박 속에서 나라의 힘을 키우기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최초로 육영사업을 실천했고, 온몸으로 혼란기 경제판을 이끈 선구자였다.

   김윤식 한국 문인협회 인천시지회장은 “서상빈은 성균관 진사로 점잖은 성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인천사람이면서도 개항 후 부내면장을 지낸 것이 전부일 정도로 처세술에 밝기보다는 침착하고 심중한 진신의 자세를 갖췄다”고 말했다.

<윤문영기자·moono7@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