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보사부는 성계원에 거주하는 나환자들이 아이를 가질 수 없도록 금지했고 아이가 있으면 부모와 서로 만날 수 없도록 격리해 수용했습니다. 성계원과 신명보육원 사이에는 철조망이 가로막고 있어 아이가 보고 싶은 부모와 부모가 그리운 아이들이 저녁이면 산을 돌아 넘어 몰래 만나곤 했을 정도였어요. 그럴 때면 한 선생이 누구보다 가슴 아파했던 기억이 눈에 선합니다.”

   원도상(84) 전 신명보육원장은 한하운 시인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오랫동안 함께 생활했다. 1952년 5월 한하운 시인이 현재의 부평구 십정동 자리에 나환자 자녀들의 양육을 위한 성계원을 설립해 초대 원장에 취임했을 때 원씨는 총무를 맡았다.

   그는 또 1975년 2월 28일 한 원장이 간암으로 유명을 달리 했을 때 시신을 손수 염하고 김포공원묘지에 안장했다고 한다. 그는 궂은 일을 도맡으며 30년을 넘게 한하운 시인의 손과 발 노릇을 했단다.

   그는 “한 선생이 시를 쓰고 나환자 구제를 위해 남은 인생을 바친 것도 결국 지난 날 나환자들을 멸시하고 천대하는 차가운 시선에서 비롯됐다”며 “한센인들에 대한 냉대는 지금도 여전하다”고 말했다.

   동암초등학교가 개교한 1965년대 무렵 이 학교 학부모와 교직원들은 근처 부평농장, 십정농장 아이들이 입학하는 것을 꺼려 농장 근처에 분교를 개교하자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고 한다. 어렵게 입학한 학교에서도 학교 선생님과 같은 반 아이들의 멸시와 천대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원씨는 “최근에 한 선생을 기리는 문학관을 건립한다는 얘기가 조금씩 나오고 있는데 나환자 가족들은 오히려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다”며 “부모가 나환자였음이 세상에 알려지기를 꺼리는 그들의 한맺힌 마음도 함께 헤아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창열기자·trees@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