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학규가 뜨고 있다! 경기도지사직에서 물러나자마자 100일 민심대장정에 나선 손 전 도지사에게 정치권과 여론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장정에 나선지 38일만에 거둔 놀라운 변화다. 손 전 지사가 박근혜 전 대표,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함께 한나라당 대권후보 `빅3'에 명함을 올린지는 오래다. 하지만 1%대의 저조한 대중 지지도로 인해 “빅3라기에는 거품이 너무 들어간 것 아니냐”는 혹평에 시달렸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그가 100일 민심대장정을 선언했을 때 정치권 안팎에서는 지지도를 올리기 위한 `정치 이벤트'로 격하하는 반응이 주류였다. 정치적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이런저런 민심 이벤트를 벌였던 정치인들이 한 둘이 아니었던 만큼 이처럼 냉소적인 반응은 어쩌면 당연했다. 실제로 지난 7·11 최고위원 선출 전당대회장에 덥수룩한 수염과 검게 그을린 얼굴로 달랑 배낭 하나 메고 나타난 그를 향해 당원들은 환호했지만, 일부 동료 정치인들은 `잘 연출한 장면'이라며 시니컬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장정의 나날이 쌓이고, 거리가 늘어나고, 만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여기에 훈훈한 대장정 에피소드가 언론에 노출되면서 `냉소'는 `경탄'으로 변했다. 대장정의 진정성이 여론에 투영되기 시작한 것이다.

 #여론, 손학규를 주목하다
 최근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 결과는 손 전 지사에게 매우 고무적이다. 경쟁자인 박 전 대표나, 이 전 시장과의 격차는 여전히 크지만 여론이 그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자체가 의미심장한 것이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가 7·26 재·보선 전날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가 단적인 사례다. 700명의 전국 성인 남녀를 대상으로 한 이 조사에서 유력 대권 후보들은 2주전의 같은 조사 결과에 비해 모두 지지도가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전 시장이 4.8%P(24.5%), 박 전 대표가 4.5%P(20.7%), 고 건 전 총리가 3.2%P(19.4%) 하락한 것. 하지만 손 전 지사는 1.6%P(4.1%)가 올랐다. 또 최근 한국리서치가 40~50대 남성들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에서 손 전 지사는 5.4%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특히 40대 초반의 지지율은 8.1%에 달했다. 그에게 호오(好惡)의 감정없이 무관심했던 대중들이 `손학규'라는 존재를 관심권에 올려놓았음을 보여주는 수치다.

 이같은 결과는 손학규의 대장정에 엄청난 정치적 폭발력이 내장돼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야의 유력 대권주자들은 여의도에서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여권의 차기 주자들은 지리멸렬한 당과 대통령 지지도 때문에 정계개편을 염두에 두고 치열한 수 싸움을 전개중이다. 고 건 전 총리도 정계개편 논의의 한 복판에서 장고를 거듭하고 있다. 한나라당의 박 전 대표와 이 전 시장은 상대적으로 높은 지지도를 배경으로 당내에서 세력 확장을 위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 모두 정치권 한 복판에서 권력을 디자인하고 있는 셈이다.


 반면 손 전 지사는 무려 100일 민심대장정 일정의 3분의1을 소화하는 동안 여의도 정치에 얼씬도 않은채 민심의 바다를 항해했다. 대중이 혐오하는 정치를 떠나, 정치권을 향한 대중의 분노와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중의 분노에 귀를 열자, 그에게 희망이 문을 열고 있다. 그가 인정하든 안하든 40일 가까이 진행된 대장정의 땀방울이 희망의 문을 열어젖힌 것으로 봐야 한다. 대장정을 떠나기 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대로 “이제 권력은 여의도가 아니라 국민으로 부터 나온다”는 발언이 허언이 아님을 증명한 셈이다.


 대장정을 통한 손학규의 일취월장에 대해 정치권의 호의적인 반응이 잇따르는 것도 유의할 대목이다. 그에게 우호적이었던 당내 수요모임은 아예 `손학규 키우기'를 공공연히 언급한 바 있다. 합리적·개방적·민주적 가치관을 공유하는 한나라당 소장파에게 손학규는 그들의 정치적 이상에 가장 근접한 대권 후보다. 문제는 낮은 지지도였다. 그러던차에 손 전 지사 스스로 대장정이라는 민심 기행을 통해 지지도 저점을 극복하기 시작했다. 최근 남경필·원희룡 의원 등 소장파 리더들이 “손학규의 지지도를 끌어올리겠다”고 나선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다.


 김학송 한나라당 홍보기획본부장은 “손 전 지사의 100일 민생 대장정을 의미있게 지켜봐야 한다”며 “손 전 지사의 지지율이 지금은 다소 낮지만 대장정이 끝나면 상당한 수준으로 상승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물론 이같은 전망에는 상당 부분 계파별 이해가 내재돼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손 전 지사의 대장정 결과가 대선 정국 전반에 미칠 영향력의 크기를 가늠하기도 쉽지 않다. 대장정이 아직 미완이기 때문이다. 손 전 지사가 연일 찾아오는 기자들의 집요한 질문 공세에도 `정치'에 관한 질문에는 묵언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를 수행하고 보좌하는 측근들의 얘기를 종합하면 손 전 지사는 그는 민심대장정이라는 `고행'이 정치권의 에피소드로 전락하는 것을 가장 경계한다. 국민의 분노와 희망을 그들의 생활속에서 접하며 새 정치의 희망을 찾겠다며 나선 대장정이다. 대장정 결단의 진정성을 대중에게 전달하려면 삿된 정치적 의도로 훼손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손 전 지사의 의중과는 상관없이 그의 대장정은 정치권과 대중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앞으로 60여일 뒤면 100일 동안 가슴속에 대중의 향기를 가득 담아온 한 사람으로 인해 대선 정국에 어떤 변화가 초래될지, 정치권의 관심이 점점 고조되고 있다.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는 대장정 초반만해도 가끔 `정치 발언'을 날려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7·11 전당대회 직후에는 `도로 민정당'이라는 세간의 냉소에 `당의 변화'를 주문했고, 소장파의 당지도부 진입 실패에는 “(사람)수 보다는 비전이 중요하다”고 훈수를 놓기도 했다. 가장 최근엔 정계개편을 정면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장정의 일정이 더해질수록 손 전 지사는 `정치'에 관해서 만큼은 `묵언'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를 쫓아내려간 기자들은 예외없이 그로 부터 `의미있는 정치 발언'을 유도하려고 애를 쓰지만 그의 묵언 강도는 더해지고 있다. 최근 대장정이 정치권과 대중의 관심을 받으면서부터는 더욱 그렇다.


 언론담당 특보인 이수영 전 경기도공보관은 “지사께서는 대장정 일정을 소화하면서 정말 행복해한다”며 “대장정 일정을 소화하면서 자신의 틀을 깨부수는 구도자의 희열을 느끼는듯 하다”고 말했다. 한동안 떠나있었던 대중적 삶의 현장을 온 몸을 던져 되찾은 기쁨이고 행복이란 것이다. 이 공보관은 “어쩌면 지사는 정말 여의도 정치를 잊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까지 말한다.
 지난달 말(7월 28일) 경동탄광에서 만난 손 전 지사가 딱 그랬다. “대장정의 역사적 사례를 보면 늘 약자가 취했던 방식 아니었나” “정치에 대해 말을 않는 것은 그만큼 정치에 대해 할 말이 많다는 것 아니냐”는 등 이런저런 도발적인 질문을 던져봤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사람 좋아보이는 미소이거나, “이 사람 정치얘기 말라니까 그러네”는 핀잔이었다.


 “대장정이 육체적으로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요즘처럼 행복한 때가 없다”고 말했다. 이날도 여러 기자들이 “대장정을 정치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고 자극했지만 “진심으로 국민에게 다가서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다”며 “국민들이 모든 것을 평가할 것”이란다. 그는 주민들과의 간담회가 마련되면 말하지 않고 듣는다. 잠시 들렀다 제 할 말만 마치고 사라지는 정치인들을 향한 국민들의 분노를 알았기 때문이다. “진심을 전달하지 않고는 대중을 설득할 수 없다”는 말이다. 대권을 향해 대중에게 선보일 그의 시대정신이 대장정 기간중에 익어가고 있다는 얘기다.


 “지난번 전당대회때 수염을 기른채 나타났더니 형님이 당장 면도하라고 전화하시더라고….” 정치권은 수북이 자란 그의 수염까지도 `연출'로 치부하고, 형님도 이를 걱정하지만 그는 태연하다. 민심과 마음을 열고 해후중인데 무슨 상관이냐는 태도다.
 60여일 남은 대장정 기간중 손 전 지사는 적어도 정치에 대해서 만큼은 말을 더욱 아낄 것으로 보인다. 그럴수록 침묵하는 자의 카리스마는 커질 것이다. 그리고 그 카리스마가 정치와 다시 만나는 날 많은 일들이 일어날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글/윤인수 정치3부장 겸 T/B팀장·김무세 정치부기자     사진/김종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