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8일 단행한 후임 법무장관 인선과 관련해 문재인 전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명하지 않았다.
노 대통령이 `문재인 카드' 선택 여부는 향후 여권의 대선 지형을 판가름할 가늠자였다. 결국 노 대통령은 고심 끝에 문재인 카드를 포기했다. 임기말 레임덕을 방지하는 동시에 당의 공세를 차단할 최적의 카드를 접은 것이다. 당의 기세가 워낙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김병준 파동에 이어 문재인 파동이 겹쳐질 경우 레임덕 방지 카드가 오히려 레임덕을 부채질할 수 있는 상황을 수용한 것이다. `문재인 카드'를 강행해 당·청 관계를 파국으로 몰어넣었을 때 득보다는 실이 많을 것으로 판단한 결과로 보인다.
하지만 `문재인 카드' 폐기로 정계 개편을 둘러싼 당·청 갈등이 봉합됐다고 보는건 너무 순진한 전망이다.
우선 김병준-문재인 파동을 거치면서 당·청간의 불신의 강도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만 천하에 공개된 상황이다. 노 대통령과 여당 지도부는 지난 6일 청와대 오찬 회동에서 “대통령의 인사권을 존중한다”는 선에서 갈등의 불씨를 묻는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잿 속의 불씨는 약간의 바람과 인화물질로도 얼마든지 화마로 변할 수 있다. 노 대통령의 `외부 선장 영입론'은 이런 의미에서 곱씹어 볼 대목이다. 현재의 열린우리당 지도부에서는 대권 후보를 찾기 힘들다는 의미라서 그렇다. 이는 필연적으로 여권의 차기 대권후보 선정과정에서 당·청간의 주도권 경쟁이 벌어질 것임을 암시한다. 더군다나 여권의 차기 후보 선정 과정이 정계개편이라는 과정을 수반하는 만큼, 당·청간의 대선 정국 주도권 경쟁은 매우 복잡다단한 양상으로 전개될 것이 확실하다.
당·청은 당분간 갈등을 감추는 표정관리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이나 당 모두 불편하지만 서로 필요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대권 지형이 형성되는 연말 쯤이면 동거의 `불편'이 `필요'를 압도할 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따라서 노 대통령이 `문재인 카드'를 포기하면서 당·정·청 관계를 재정립하는 이득을 챙기고, 여당은 `문재인 불가론'을 관철시켜 체면을 세운 것은, 불편한 동거를 위한 양측의 양해각서와 같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편집자 주〉
“노무현 대통령이 향후 정계 개편과 차기 대권 로드맵의 코디네이터가 될 수 있을까?” 올해 초부터 여권 출입기자들의 취재 화두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친노(親盧) 의원들을 제외한 열린우리당 다수 의원들의 대답은 단연 `노(No)'다. 심지어는 일부 친노 의원들조차 “무슨 그런 질문을 던지느냐”면서 곤혹스러워한다.
그러나 지난 6일 노 대통령이 우리당 지도부와의 회동에서 “선장을 외부에서 영입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퇴임후에도 당에 남아 백의종군하겠다”고 운을 떼자, 당은 발언의 행간에 스며있는 진의를 읽느라 우왕좌왕했다. “당의 `선 자강론 원칙' 강조한 것”이라거나 “향후 정계개편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라든지 계파별 이해에 따라 해석도 달랐다. 일부에서는 “당의 소유권을 주장한 것”이라는 확대해석 까지 등장했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몸 따로, 마음 따로 분열된 우리당 의원들의 현위치를 극명하게 노출된 것이다.
이 와중에 눈에 띈 대목은 수도권과 호남출신 의원들의 담담한 반응이었다. 경기도 출신 한 재선 의원은 “노대통령이 아직도 정국주도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라면서 “갈수록 태산”이라고 풋웃음을 지었다. 서울출신 한 초선의원은 “지방선거와 재보선을 거치면서 탄핵보다 더한 심판을 받았다”며 “변화의 순간이 다가올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의 선장 발언과 상관없이 `결론은 결별'이라는 얘기다.
이들에 따르면 당내 중론은, `노 대통령이 향후 대선에 개입하면 우리당은 망한다'는 쪽으로 결론난 상태라고 한다. 또한 퇴임직전 대통령의 정치 불개입은 정치권에선 `암묵적 합의'에 가깝다는 것이다. 내년 대선에 승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쫓기다시피 하는 당의 입장에서 대통령의 참견을 새겨 들을 여유가 없다는 것이 담담한 반응의 배경인 셈이다. 이들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수용하면 열린우리당의 대선 로드맵에, 노 대통령이 차지하고 설만한 여지가 별로 없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노 대통령이 선장 외부영입론과 정계개편론을 언급한 것은 사실상 당심과 역행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노 대통령은 자신의 역할을 주장했고, 당으로선 허를 찔린 셈이었지만, 이틀 뒤 당이 싸늘할 정도로 냉정을 되찾은 것을 보면 이들의 주장이 허무맹랑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노 대통령이 문재인 법무장관 기용 카드를 접었으나, 당내에서는 “당연한 것 아니냐”는 반응 일색이었다. 고마워하기는 보다는, 오히려 인사권으로 당을 농락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섞인 반응도 있었다.
우리당내에는 노 대통령을 대선 최악의 걸림돌로 보는 인사가 적지 않다. “노 대통령의 공과를 안고 대선을 치를 생각만 해도 죽을 맛인데, 대선 가도에서 무슨 초를 칠지 모른다”는 게 이들의 우려다. 당이 청와대와 결별해야 하는 이유는 대략 세갈래로 나뉜다. 10%안팎으로 전락한 노 대통령의 대중적 지지도, 퇴임하는 국정최고책임자, 전국정당화의 실패로 인한 지역기반 상실이 그것이다.
잣대를 어디에 들이대든, 노 대통령은 감표 요인이라는 것. 뒤집어보면 열린우리당이 노 대통령을 얼마나 깊이 불신하고 있는가를 반증하고 있다. 재야출신 한 인사는 “(노 대통령에게서)국민은 완전히 떠났다. 그 사실을 모르는게 더 큰 문제”라면서 “이대로 가면 내년 대선은 거의 절망적”이라고 말했다. 상임비대위원인 한 중진의원은 “5·31 지방선거에서 참패하고도 (대통령이) 겸손하지 못하자, 7월 재·보선을 통해 국민적 탄핵 분위기를 다시한번 확인시켜줬다”고 꼬집었다.
심지어 당내에서는 “정국주도권은 물론, 정계개편에서 우리당의 역할이 없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대선을 향한 우리당의 로드맵에서 노 대통령의 역할은 오히려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김근태 의장과 임시지도부의 1차적인 과제도 “여하히 당의 분열 없이 민주당과 충청권을 포함한 범 여권을 통합하여 대선에 임할 수 있는가”에 있다.
우리당내에서는 이와관련 최소한 민주당과의 재통합은 거의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민주당 파당(破黨)과 열린우리당 창당 3인방의 한사람인 천정배 의원의 당 복귀 일성도 같은 맥락이다. 천 의원은 “민주당의 한화갑·조순형·추미애 의원 등을 껴안지 못한게 우리당의 한계였다”고 고백했다. 우리당의 실패와 민주당의 실체를 인정한 것. 우리당의 대권 로드맵의 기조는 올해를 민생 정기국회로 마무리한뒤 질서있게 정계 개편에 대비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노 대통령의 `선장 외부영입론'은 `오버'일 수 밖에 없다. 노 대통령이 열린우리당의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고 언급할 정치환경과 시점이 아니라는 얘기다. 특히 “당에 끝까지 남겠다”는 발언을 “당을 깰 사람은 깨고 나가라는 선전포고로 해석할 수 밖에 없다”는 반응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결국 여당은 노 대통령이 변화하지 않는 한 당과 청와대의 결별은 `예정된 수순'으로 보고 있다. 당은 백척간두에서 대선 승리를 위해 `올인'해야 하지만, 물러나는 대통령은 자신의 국정철학과 정치노선 계승을 우선시한다는 것.
당내 한 중진의원은 “대통령이 국정스타일을 여당의 대권 로드맵에 맞추어 바꿔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면서 “이미 물밑에서 정계 개편이 진행중”이라고 까지 말했다. 원외 한 고위 인사는 “열린우리당·민주당·국민신당 등을 포함한 범여권 중도개혁세력의 통합론의 틀을 선택하느냐는 그 스스로(노 대통령)의 선택에 달렸다”고 확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