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자리에 있을 때 당신 자식들 좋은 자리에 챙겨 앉히지 않는다고 시어머니는 늘 불만이셨습니다. 그럴 때면 아버님은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뒤도 돌아보시지 않으셨습니다.”

   큰며느리 박양서(59·부천시 상동)씨는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님은 개인 욕심이 없었던 분이었다. 살아오시면서 가족들이 섭섭할 정도로 `밖의 사람'이었다”며 “오로지 인천발전을 위해 애를 많이 쓰신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최정환 선생은 21살되던 해인 1938년 부인 박장순(1998년 작고)씨와 결혼했다. 슬하엔 영민(66), 영호(63), 영일(61), 영애(59), 영국(57), 영숙(54), 영훈(51)씨 등 5남2녀를 두었다.

   영민·영호 형제는 먼 친척의 도움을 받아 현재 강원도 횡성군에서 식자재를 납품하는 소규모 군납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다른 형제들은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당시 최 선생의 남동구 간석동 신명여고 옆 저택은 인근 유치원과 회사에서 야유회를 올 정도로 아름다운 정원을 자랑했다고 한다. 1972년 설립한 신명여고는 당시 경기도 전체에서 유일하게 학교 운동장에 잔디가 깔린 학교로 유명하기도 했다.

   박씨는 “아버님은 학교를 설립하시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에 일어나 목장갑을 끼고 나무를 직접 전지할 만큼 많은 애착을 가졌다”며 “국회의원에 낙선하고 말년에 꽃과 나무를 가꾸면서 생을 정리하셨다”고 술회했다.

<이창열기자·trees@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