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 최북단 섬 인천 옹진군 백령도와 대청도. 그곳엔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때묻지 않은 천혜의 자연이 숨쉬고 있었다. 도시의 빡빡한 삶에 찌든 가슴을 씻어줄 여유있고 순박한 섬사람들의 미소가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인천보다 북한 땅이 더 가까운 그곳에 서면 우리나라가 분단국가라는 사실이 거부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 온다. 반세기가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분단의 흔적은 백령도와 대청도의 새파란 자연 위 여기저기에 덧칠해져 있었다.


 ◇서해의 종착역=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9일 오전 7시 10분 인천항연안여객터미널. 하루에 한번 백령도를 왕복하는 쾌속선 마린브릿지호는 300여 명의 승객들을 태우고 천천히 부두를 떠나 서쪽 바다로 내달렸다. 이번 여행은 옹진군 지역활력 사업의 일환인 팸투어. 다른 지역 공무원과 관광업계 종사자 등에게 관광지로서 백령도와 대청도의 잠재력을 홍보하기 위해 마련됐다. 날씨가 맑아 운항에 지장이 없었는데도 소청도와 대청도를 거쳐 `서해의 종착역' 백령도까지는 4시간 30분이 걸렸다. 인천에서 직선거리로 173㎞이지만 안전을 위해 공해상을 돌아와 실제 운항거리는 223㎞ 정도 됐다. 긴 항해에 지친 몸을 털고 용기포항에 발을 디디자 비릿한 바닷내음과 함께 신선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밀려들어왔다. 사진으로만 봤던 백령도의 때묻지 않은 자연이 눈 앞에 펼쳐졌다.


 ◇신비로운 백령도의 자연=용기포항 옆은 `천연비행장'이라 불리는 사곶해변이다. 전 세계에서 이탈리아 나폴리해변과 더불어 단 두개 뿐인 천연비행장이다. 버스기사는 “나폴리에 가보진 못했지만 3.7㎞에 이르는 사곶은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긴 천연비행장일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해변 위를 달리는 버스는 마치 콘크리트로 포장한 도로를 주행하는 것 같았다. 버스에서 내리자 보기엔 단단한 듯 했지만 푹신한 느낌의 해변이 발을 감쌌다. 사곶 해변은 규암가루가 쌓이고, 그 사이에 뻘이 섞여 만들어졌다. 6·25전쟁 때 유엔군의 활주로로 사용됐고, 지난 1985년까지 공군비행기가 이착륙했다고 한다.

 콩돌해안은 사곶에서 남서쪽에 있다. 이 해안엔 이름 그래도 모래 대신 콩알만한 갖가지 색의 돌들이 2㎞ 가량 깔려있다. 부서진 규암들이 파도에 씻기며 오랜 세월 서로 부대껴 콩처럼 작은 돌이 됐다. 1970년대까지 주민들은 이곳에서 예쁜 돌을 골라 일본으로 수출까지 했다고 한다. 콩돌들 사이로 유난히 예쁜 녹색돌 하나가 눈에 띄었다. 손으로 집어 자세히 보니 사이다병 조각이었다. 언제 누가 사이다 병을 깨뜨렸을까. 자연은 놀라웠다. 인간이 만든 유리조각까지도 아름다운 보석으로 다듬는다.

 백령도 북서쪽 약 5㎞ 해안에는 `돌의 미학'이라 불리는 두무진이 있었다. 깎아지른 듯 쭉쭉 뻗은 웅장함과 바윗결의 섬세함은 이곳을 `백령도 여행의 백미'로 만들었다. 어선을 개조한 배를 타고 바다로 나서자 배안 여기저기서 일행들의 탄성이 터져나왔다.
 코끼리바위, 선대바위, 장군바위, 형제바위 등 갖가지 형태의 기암괴석은 `서해의 해금강'이란 명성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이 대자연의 신비 앞에서 어떤 형용사를 동원해야 하나…. “하늘이 내려준 최고의 조각품”이란 선장의 한 마디가 한참동안 귓가에 맴돌았다.


 ◇모래와의 전쟁=백령도에서 쾌속선으로 20여분 떨어진 대청도. 섬 면적과 인구가 백령도의 4분의 1 수준인 이 섬엔 우리네 옛 어촌의 모습이 오롯이 남아있다. 도시에선 그 흔한 PC방이나 술집 등 유흥시설은 눈을 씻고 찾아도 볼 수 없는 섬이 대청도이다.

 대청도는 한때 사막을 연상시키는 모래사막으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지금은 모래와의 전쟁이 한창이었다. 밖에서 볼 땐 이국적인 정취가 어쩌고 하지만 당사자들에겐 생존권이 달린 문제였다. 모래와의 사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은 북쪽 옥죽동 일대와 서쪽 농여에서 지두리해변 사이. 6·25전쟁으로 나무가 벌채된 데다 중국에서 밀려오는 모래가 이곳을 사막으로 만든 주 이유이다. 이 지역 주민들 사이에선 “시집이나 장가가려면 모래를 서말은 먹어야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 정형택 대청면장은 농여해변 앞바다에 뜬 황색 띠를 가리키며 “저게 바로 중국에서 조류를 타고 밀려오는 모래”라며 “모래가 해안에 쌓인 뒤 하늬바람을 타고 인근 산과 주민들에게까지 날아든다”고 말했다. 정 면장은 너무 미세한 모래라 쓸 곳이 없어 더욱 애물단지라고 말하며 한숨을 쉰다.

 대청도에선 지난 1993년부터 5년간 사방(沙防)사업이 벌어졌다. 4억원을 들여 볏짚을 설치하고 모래사막 3만여 평에 해송을 심었다.
 농경지 피해는 줄일 수 있었지만 지금도 해송 숲은 빠르게 매몰되고 있었다. 물에 빠진 사람이 목만 내놓고 허우적 거리는 모습처럼 해송들은 맨 윗부분만 겨우 살아남아 모래 밖으로 삐죽 나와있었다. 자신의 키 만큼이나 높인 쌓인 모래에 3면이 둘러싸인 공중화장실을 보니 대청초등학교가 모래에 파묻혀 이전해야 했다는 주민들의 얘기가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자연산'이 무슨 말인가=뱃길이 너무 멀어서 힘들었다는 푸념에 백령도 주민 김선희(43·여)씨는 “그래도 지금은 쾌속선이 있어서 그 정도”라며 “10여년 전만 해도 14~15시간씩 걸려야 인천에 나갈 수 있었다”고 대꾸했다. 김씨의 답변에서 백령도까지의 지리적인 거리 뿐 아니라 정서적인 차이도 느낄 수 있었다. 그만큼 바다에 둘러싸인 섬 생활은 육지에서 만나지 못한 새롭고 낯선 경험이었다.

 북과 마주하고 있는 백령도는 어업에 제한이 많아 어민들보다는 농사를 짓는 주민이 많은 섬이다. 반면 대청도는 주민 대부분이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 백령도 주민들은 농작물을 키워 대청도의 물고기와 바꿔 먹었다고 한다. 물론 이 물고기들은 모두 직접 잡은 것들이다. 사면이 풍성한 어장이기에 양식을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육지의 횟집이나 가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연산'이란 표현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심지어 한 주민은 얼마전까지 `자연산'이란 말 자체가 없었다고 귀띔했다. 바다에서 나는 건 당연히 자연산인 것이다. 구태여 물을 필요도 없고, 의심하면 시간낭비다. 단 2000년대 들어 양식이 시작된 전복과 다시마는 예외이다.

 섬에서 본 차들은 거의 대부분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창문이 열린 채 열쇠가 꽂혀있는 차들도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다. 물어보니 “모두 아는 사람들이고, 설사 타고 가더라도 섬 안이지 어딜 가겠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듣고 보니 그랬다. 육지에선 흉내낼 수 없는 섬 사람들의 특권이었다. 백령여행사 최대훈(31)씨는 “백령도나 대청도에선 `범죄'라는 단어를 쉽게 들을 수 없다”며 “대신에 섬도 사람이 사는 곳이기에 `사고'라는 단어를 듣는 경우는 있다”고 말했다.


 ◇아 분단의 상처여!=지난 11일 오후 7시 30분 대청도 농여해변. 대지를 뜨겁게 달궜던 여름해가 서서히 서쪽 바다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수평선에 걸린 한조각 구름에 가려 노을은 제 빛을 다 뿜어내지 못했지만 이 정도 만으로도 서해의 낙조는 충분히 아름다웠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자 훈련을 마친 해병대원들도 떠나고, 이내 해변엔 파도소리와 갈매기만 남았다. 불야성을 이루는 동해의 여름 해변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해변이었다. 농여 뿐만이 아니었다. 북과 대치 중인 백령도와 대청도의 해변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둘로 나뉜 해변 한쪽에서 시커먼 해병대원들이 거친 구령을 토해내며 훈련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는 게 이곳 해수욕장의 풍경이다.

 도로 옆에 전시된 탱크와 대포, 적의 잠수함을 막기 위해 해변을 수놓은 `용치(龍齒)', 그리고 섬 둘레에 매설된 지뢰들. 심지어 절경 중의 절경이라는 두무진 바위 틈 곳곳에도 해병대의 초소가 있었다. “철조망이 쳐진 곳은 지뢰가 있을 지 모르기 때문에 절대로 들어가면 안된다”는 대청도 주민의 한마디에 식은땀이 흘렀다. 민간인보다 군인들을 더 많이 볼 수 있는 섬. 그 섬 곳곳에 보이는 참호와 녹슨 철조망, 북쪽을 응시하는 군인의 눈빛은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이곳이 최북단이란 걸 실감하게 만들었다.
 지난 9일 오후 백령도에 있는 심청각에 올랐을 때 북녘땅은 마치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었다. 심청이가 아버지를 위해 몸을 던졌다는 장산곶 앞 인당수가 훤히 보였다. 북방한계선(NLL)을 따라 남북 사이 바다에서 조업 중인 중국어선 3척도 눈에 띄었다. 심청각에서 장산곶까지 직선거리는 14㎞. 북한땅인 월내도까지는 불과 7㎞에 불과했다. 북녘이 이렇게 가깝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남북이 갈리지 않았다면 북한에서 보는 백령도는 인천에서 보는 영종도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중국어선들이 대치 중인 남북의 빈틈을 파고 들어와 교묘하게 조업하는 건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다. 육지를 지척에 두고도 반세기 넘게 고립된 생활을 해야만 했던 섬 주민들 가슴에 응어리가 맺히는 일도 결코 없었을 것이다.
 `서해 최북단'은 결국 우리가 만들어낸 말이었다. 천혜의 자연을 갖고 있지만 온몸에 분단이란 상처를 새겨야만 했던 백령도와 대청도. 이 섬들 위에 씌어진 `서해 최북단'이란 굴레가 벗겨지는 그날은 과연 언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