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귀국 (30)
서울로 귀국하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해 주고 죽은 작은 아버지와, 김분이의 능청스런 허위 증언이 뒷받침되어 박준호는 귀국이 아니라 17만달러를 손에 쥐고 미국으로 잠입, 뭔가 일을 벌리고 있다는 확증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혼돈을 가중시키는 교란 작전이라고나 할까.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기어코 이승과 저승을 달리 한 것은 그해 봄, 만발한 벚꽃이 함박눈처럼 풀풀 날리던 토요일 오후다.
노근리 사건은 미군이 한국 양민을 죄 없이 살해한 희대의 노략질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던 할아버지. 노근리에서 비명에 간 할머니와 어린 아들 딸과의 만남을 위해 할아버지는 그처럼 홀연히 이승을 떠났다. 아니, 노근리의 억울함을 풀지 않고서는 절대로 눈을 감을 수 없다고 끝까지 버티던 할아버지가 기어코 맥을 놓고만 것이었다.
박준호는 통곡한다. 괜히 눈물이 흐르고 쏟아진다. 벚꽃 잎의 낙화인 양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 아버지, 작은아버지, 두 어른의 억울한 죽음의 슬픔이, 아니 그때까지도 스카이 홍의 그림자도 찾지 못한 답답함이, 어딘가 막혀 있다가 그제야 터져 나온 것처럼 박준호는 엉엉 통곡해 마지 않는다.
단짝 친구인 한태훈도, 김분이도, 그녀 남편인 유범성도 같이 흐느껴 울어준다. 그뿐 아니다.
런던에서 접선하고, 처음 만나는 영림그룹 서승돈이, 할아버지 부고 소식을 어떻게 알았는지 찾아와, 너무도 애통하다는 듯이 눈시울을 오래오래 붉게 물들여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서승돈이 박준호의 손을 붙잡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래, 여기서 만나는구만. 할아버지 위독하다는 소리 듣고 나왔겠지. 그래, 잘 나왔어. 아무렴 준호도 없는 장례식은 생각도 할 수 없지. 혹시 어머니도 같이 나오셨나?”
박준호가 더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어머닌 모르세요.”
“뭘, 몰라?”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 말입니다.”
“그렇다면….”
“괜찮아요. 어머닌 어차피 시집을 가버리셨으니까요.”
“그렇긴 하지만….”
“그리고, 전 아예 귀국했습니다.”
“아니, 영국에서 대학을 다니기로 했지 않았나?”
“한국에서 다니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다닌다구?”
서승돈이 의외라는 듯 더 목소리를 높인다. 박준호는 더 차분하게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연다.
“돌아가신 작은아버지도, 할아버지도 모두 말리셨지만, 제 뜻은 그 반대라서…. 결국 제가 알아서 결정했습니다.”
“하긴 이제 두 어른 다 가버리셨구만.”
서승돈이 할아버지 영정을 힐끔 본 다음, 마주 잡는 손아귀에 더 큰 힘을 부여한다. 손이 깨어지는 것 같다. 그가 말한다.
“그래, 어쩌면 준호의 결정이 옳은지도 몰라. 여기서도 할 일이 많으니까. 암, 할 일이 많구말구. 우리나라도 이제부터 시작이거든. 새롭게 민주화 된 대한민국 말이야. 그래, 굳이 양아버지 영향력 밑에서 눈치나 슬슬 보며 그 아류가 될 필요는 없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