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는 유대인들
 이스라엘의 국어는 히브리어(문자)다. 당연해 보이는 이 사실의 기저에는 사실 유대인들의 피와 땀이 녹아들어 있다. 유대인들이 AD 70년이후 2천년간 나라 없이 전세계에 흩어져 유랑생활을 하면서 히브리어는 점점 사멸의 수순을 거쳤다. 히브리어는 성서, 랍비의 저술, 격식을 갖춘 기도 등을 통해 유대인들 사이에서 전승되었지만 19세기에는 이러한 상황들 이외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던 해에 사라졌던 히브리어가 다시 등장하는 유례없는 일이 발생했다. 그리고, 히브리어는 이제는 한 나라의 국어로서 아마도 300만명 이상의 거의 모든 이스라엘인들이 사용하는 모국어가 되었다.

 인위적으로 문자와 언어를 되살리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지난한 과정이었을지는 보지 않아도 뻔하다. 그런 상황을 알면서도 유대인들이 그 모든 것을 감수했던 것은 그만큼 ‘히브리어(문자) 부활 프로젝트’가 유대인들에게 중요하고, 또 놀랄만한 성과를 거두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자는 단순히 말을 기록하는 도구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유대인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 ‘표지판의 역사’에도 잘 나타나 있다. 취재진이 이스라엘에 머물동안 목격한 도시의 표지판은 모두 히브리 문자로 적혀 있었고, 그 밑에 영어가 병기되어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렇지는 않았다. 1919~1948년, 팔레스타인이 영국의 통치하에 있었던 때에는 영어가 위에 오고 아랍어·히브리어가 차례대로 쓰였고, 요르단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는 아랍어·영어 순으로 쓰여진 표지판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는 요르단이 정치적으로 우세했음을 의미했으며, 히브리어를 없앤 것은 사실상 유대인들의 주장이 아무런 정통성도 없다는 것을 밝힌 것을 뜻한다. 이스라엘이 1967년에 예루살렘을 탈환했을 때, 그들도 3개 국어로 된 표지판을 세웠다. 이번에는 히브리어가 위에 오고, 아랍어·영어가 밑에 왔다. 1984년경부터 유대인 지역에서는 도로 표지판에 적혀있는 아랍어를 페인트로 칠하거나 아예 벗겨버리거나 아랍어가 보이지 않도록 스티커를 붙여놓기도 했다. 예루살렘 시가지에 있는 표지판에는 아예 아랍어가 쓰여있지 않았다. 이스라엘을 거쳐간 여러 민족들이 이처럼 각기 다양한 표지판을 만들었던 이유는 바로 ‘하나의 문자가 바로 그 문자를 쓰는 민족을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대인이 히브리 문자를 부활시킨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다.

▲ 예루살렘의 표지판. 중간의 아랍어가 알 수 없는 스티커로 가려져 있다.
 신생국가 이스라엘이 내부적으로 해결해야 할 첫 번째 과제는 이 새로운 국가공동체를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언어’였다. 1881년에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엘리에제르 벤 예후다(Eliezer ben Yehuda·1958~1922)는 강력한 캠페인을 통해서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채택하게 만들었다. 그와 아내 드보라 요나스(Deborah Jonas)는 서로에게 히브리어만을 가지고 대화하기로 했다. 이로써 그들은 히브리어로 말하는 첫 번째 가정이 되었고 그의 장자인 벤시온(Ben Zion)은 히브리어로 말하는 첫 번째 아이가 되었다. 그후 히브리어는 현대어로의 변신에 성공을 거두게 되어 일상생활의 구체적인 부분들까지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히브리어의 생활화를 위해 자신의 이름까지 바꾸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벤 예후다가 페럴맨(perelman)이었던 자신의 이름을 바꾸는 것으로 새로운 히브리어 관습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이주민들은 이스라엘에 이주하자마자 히브리어를 배웠고 자신들의 이름을 바꾸기 시작했는데, 예를 들어 데이비드 그루엔(David Gruen)혹은 그린(Green)은 다비드 벤 구리온(David Ben Gurion)이 되었다. 이는 외국어로 발음하기 편리하다며 최근 태어난 아이 이름에 순우리말을 배제한 영어식 이름(수지·제인)을 짓고있는 우리 세태와 퍽 대조적이다.

▲ 전통복장을 고수하는 유대인들. 이는 이질화된 유대인 이주자들의 정신과 사상을 통합해주는 역할을 한다.
 히브리 문자의 부활 과정은 한글의 미래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인터넷 외계어의 범람과 외국어의 홍수 속에 길을 잃고 있는 한글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 지침표가 되어주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 문자의 부활은 아이들이 히브리어 학교를 마치고, 결혼해서 히브리어를 하는 아이를 낳아 기르기를 기다려서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히브리어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예후다’라는 일개 개인의 가정안에서 싹을 틔웠고 ‘광범위한 사회적 공감대와 협조’ 덕분에 불붙듯 번져나갈 수 있었다. 벤 예후다가 가지고 있던 히브리어 부활의 꿈은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인 사회 분위기와 부합했기에 실현이 가능했다. 그가 팔레스타인에 이주해 올때 그곳에는 이미 많은 수의 젊은 이상주의자들이 새로운 유대인 사회를 건설하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조국의 땅에서 그들의 모국어로 히브리어를 사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 벤 예후다의 히브리어 보급 운동은 폭넓게 지지를 받고, 이들로 인해 가정과 학교에서 히브리어 사용은 금방 확산되었다. 한글도 ‘제국의 언어’의 외풍에 끄떡없이 21세기의 표준문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처럼 언어를 유지하려는 보다 많은 사람들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노력이 필요하다. ‘강한 것이 살아 남는게 아니라 살아남는 것이 강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이스라엘)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취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