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주목할 만한 일은 세종대왕의 영도 아래, 한글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이것은 전 세계에서 가장 훌륭하고, 가장 단순한(the best and the simplest) 글자라고 인정되고 있다. 이 24개의 부호가 조합될 때, 그것은 인간의 목청에서 나오는 어떠한 소리도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다. 그것은 세종 대왕과 그의 학자들이 한국 것은 물론이려니와 많은 외국의 문헌을 연구하여 음운론의 원칙을 연구하였기 때문이다. 세종은 천부의 재능의 깊이와 다양성에 있어서 한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할 수 있다.” -펄 벅, 살아있는 갈대(The Living Reed)의 서문 중.

한국인이 제 윗대로부터 물려받은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값어치 있는 것 하나만을 골라내라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한글을 꼽을 것이다. 간송미술관이 간직하고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70호)을 국보 1호로 새롭게 지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간간이 들리는 것도 그래서일 테다. 한글에 대한 이런 자부심에는 넉넉한 근거가 있다. 한글은 `과학과 휴머니즘'이라는 대척점에 있는 두 개념을 모두 껴안는 글자이기 때문이다.

한글은 본격화될 ‘음성인식’ 시대에 유리한 글자로 꼽힌다. 글자와 소리가 1 대 1 대응하는 특성 덕분에 음성인식률이 다른 문자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 한글은 한가지 문자가 한가지 발음으로만 소리난다. 영어의 ‘a’는 때에 따라 ‘아’ ‘어’ ‘애’ 등으로 발음되지만 한글 모음 `ㅏ’는 언제나 ‘아’로 소리난다. 인쇄체와 필기체, 대문자와 소문자의 구분도 없다. 문맹률이 0%에 가깝고 독서 장애가 드문 까닭이 여기에 있다. 낮은 문맹률은 높은 교육 수준과 양질의 노동력으로 이어진다. 한글이 경제성장의 원동력이었다는 해석은 비약이 아니다. 정치적 민주화도 비슷한 맥락이다. 문맹률이 높아 지식과 정보가 특정계층에 집중되고 나머지가 소외되면 민주주의 담론의 확산은 느릴 수밖에 없다.

또 한글은 ‘IT강국 대한민국’의 튼튼한 날개이기도 하다. 지하철을 타면 수많은 청소년들이 휴대전화 화면에 코를 박고 있다. 친구나 연인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기 위해서다. ‘엄지족’들의 손놀림은 날렵하다 못해 신기(神技)에 가깝다. 이는 휴대전화 입력의 대표적인 방식인 천지인(天地人) 방식 덕분이다. 이는 천(·)지(_)인(l)의 모습을 본떠 만든 모음의 생성원리를 그대로 적용하고 있어 빠른 속도로 한글을 입력할 수 있도록 한다. 중국은 한자를, 일본은 한자와 가나를 혼용하면서 정보 처리가 비능률적인 것과 대조적이다. 비슷한 양을 컴퓨터에 입력하는데 한자·히라가나보다 한글이 7배 빠르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다.

하지만 한글은 무엇보다 과학적이라는 특징 못지 않게 `휴머니티'를 갖추고 있기에 더욱 돋보이는 글자다. 모든 이에게 문호가 열려 있고 진입장벽이 낮은, 평등한 문자라는 점에서 그 우수성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자음 14개와 모음 10개, 단 24개의 자모로 8천800개의 소리를 표현할 수 있는 ‘경제적’ 문자인 한글은 외국인도 배워서 익히기가 극히 쉽다. 이러한 한글의 특성은 드디어 국제 기구에서 공인을 받기에 이르렀다. 유네스코(UNESCO)에서는 1990년부터 해마다 세계에서 문맹 퇴치에 공이 큰 이들에게 ‘세종대왕 문맹퇴치상(King Sejong Literacy Prize)’을 주고 있다. 이 상의 이름이 세종이라는 이름을 딴 것은 세종 임금이 만든 한글이 가장 배우기가 쉬워서 문맹자를 없애는 글임을 세계가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글 덕분에 세계에서 문맹률이 가장 낮은 나라에 속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여 한글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사회 전반에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한 디자인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한글의 조형성이 표현요소로서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한글은 자소를 기본단위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자유롭게 배치하면 정방형이 아닌 다양한 조형미를 갖는 글자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한글 글자체 중 이러한 한글의 속성을 이용하여 정방형의 모양을 탈피한 글자체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는 정방형을 기본 골격으로 하는 다른 문자들에서는 보기 힘든 요소이다. 한글의 이러한 특성들은 한글의 문화상품과 패션에 응용돼 해외에서 각광을 받기도 했다. 디자이너 이상봉씨가 장사익, 임옥상씨의 필체로 디자인 한 옷을 지난 2월 프랑스 파리에서 선보여 기대이상의 호응을 얻은 것이 그 대표적 사례다. 이처럼 21세기 정보화 시대에는 다양한 매체들을 이용해 한글의 독창성과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입증시키는 등 한글이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문양으로서도 활용될 수 있도록 토양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우리말의 뿌리를 찾아서'의 저자인 백문식(56)남양고등학교 교장은 “문화상품 등 실생활 분야에까지 응용되어야 한글은 합리적인 것을 추구하는 세계인의 생활 속에 성공적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라며 “한글의 우수한 점을 정보화시대에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서는 인쇄매체가 아닌 각종 영상매체를 위한 글자체까지 개발하는 등 한글의 가독성과 조형미, 예술성을 극대화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취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