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박밭 옆으로 고려인들의 판잣집이 늘어서 있다. 작은 사진은 판잣집 내부
[5] 볼가강변의 고려인1

큰길에서 갈대로 에워싸인 오솔길을 5㎞ 남짓 달렸다. 키 높이보다 높게 자란 갈대 때문에 한치 앞도 분간하기 힘든 진창길을 겨우 빠져 나오자 거짓말처럼 넓은 경작지가 펼쳐졌다. 토마토가 여름 햇빛을 흠뻑 머금고 탐스럽게 영글었고 감자밭도 한창 물이 올랐다. 그리고 밭 한 귀퉁이에 지붕과 굴뚝만 있는 괴상한 집이 눈에 띄었다.

▲ 러시아 경찰의 눈을 피해 겨울을 나기위해 고려인들이 지은 땅집.
볼고그라드 고려인들은 `땅집'이라고 불렀다. 참호처럼 땅을 파내고 그 위에 지붕을 얹은 것이다. 가을걷이를 끝내고 돌아갈 곳이 없는 불법체류자 신분의 고려인들은 러시아 경찰이나 공무원들의 눈을 피해 외딴 밭에 땅집을 만들고 겨울을 났다.

우즈베키스탄에서 넘어왔다는 천 가오리우(50)씨는 “겨울잠 자는 곰처럼 지냈다”면서 “올핸 농사가 잘돼 집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다시 차를 달려 천씨의 땅집에서 20분 거리 떨어진 벌판에서 박 비사리온(61), 박 일리오노라(61·여) 부부를 만났다. 이들 부부는 임대한 밭 바로 옆에 천막을 짓고 살았다.

인근 끄리몰스크라는 마을에 집이 있지만 봄 파종기부터 가을 추수때까지는 천막에서만 산다. 일할시간이 아까워서라고 했다. 부부가 빌린 땅은 1.5㏊. 노인 두명이 감당하기 힘든 규모다. 부부는 아침 6시부터 해가 완전히 떨어지는 밤10시까지 개미처럼 일했다.

▲ 고된 노동으로 두달반동안 앞니가 모두 빠졌다는 박 비사리온씨와 그의 아내 박 일리오노라씨.
타지키스탄에서 내전이 터져 9년전 쫓기듯 볼고그라드로 이주한 박씨 부부. 남편은 농지조합 부회장, 아내는 수학선생이었다. 나름대로 인텔리였던 이들이 볼고그라드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재산도 모두 버리고 왔고 딱히 기술도 없었다.

2년동안 막노동 끝에 겨우 농사지을 땅을 임대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정작 시련은 이때부터였다. 부부는 몸이 부서져라 일했지만 농사경험이 일천한 이들에게 땅은 냉정했다.

박 비사리온씨는 “첫해 농사를 실패하고 돈이 없어 두달반동안 검은 밀빵만 먹고 일했다”면서 “그때 몸무게 20㎏이 빠지고 앞니도 다 빠졌다”고 아픈 기억을 되씹었다.

그래도 이들 부부는 “지금은 일할 땅이 있어 행복하다”고 했다.

박씨 부부의 구릿빛 미소를 뒤로하고 큰 길로 나왔다. 볼가강을 끼고 볼고그라드시 방면으로 1시간 남짓 이동하자 이번엔 너른 수박밭 경계에 30여채의 판잣집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 고려인 수박밭.
우즈베키스탄 고려인들이 한철 농사를 위해 지은 임시 거주처였다. 침실과 부엌, 두칸으로 구성된 판잣집들은 맨바닥에 겨우 햇빛과 비를 피할 수 있을 정도로 엉성했다. 비록 사는 곳은 누추하지만 이들은 우즈베키스탄인과 현지 러시아인들까지 잡부로 고용해 100㏊나 되는 거대한 수박밭을 일구고 있었다.

이렇듯 볼고그라드의 고려인은 크게 두 부류다. 영구 이주한 고려인과 봄·여름 농사를 짓고 가을에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등 국적지인 중앙아시아로 다시 돌아가는 고려인으로 나뉜다. 두 부류 모두 농사철에는 자기 밭 옆에 천막이나 움막을 짓고 산다.

영구 이주한 고려인은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고려인들도 있지만 상당수가 신분이 불안정한 불법체류자 신분이다. 볼고그라드주에 사는 고려인은 대략 4만명 정도로 연해주와 더불어 러시아 최대 고려인 밀집 지역이다. 이중 1만5천명 정도가 불법체류자로 추정된다. 볼고그라드 고려인의 80% 정도는 볼가강 주변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연해주의 고려인이 `뿌리'를 찾아 이주했다면 볼고그라드의 고려인은 철저히 생계를 위해 이주한 경우다. 중앙아시아에 강제이주됐던 선조들이 그러했듯이 소비에트 붕괴이후 고려인들은 러시아 볼가강변의 황무지를 기름진 밭으로 일궜다.

뾰또르(60) 볼고그라드 고려인협회 부회장은 “이곳 사람들이 먹는 채소의 70%를 고려인들이 생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