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노무현 대통령이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동교동 자택을 전격 방문했다. 청와대측은 이틀전 문을 연 김대중 도서관 전시실 개관을 축하하기 위한 방문이라고 했고, DJ측 최경환 비서관은 “후원회 행사직전 청와대측에서 노 대통령의 방문의사를 타진해왔고 부부동반 오찬자리가 이뤄지게 됐다”고 설명했다. 모두 뭔가 군색한 설명으로만 들린다.

여야 정치권은 물론 호사가들 사이에서 구구한 억측과 해석이 난무하는 이유다. 현직 대통령이 전직대통령의 사저에 찾아가 2시간여동안 오찬을 나눈 전례가 없었던 데다, 그동안 노와 DJ의 정치적 정책적 간극이 멀었기 때문이다. 여당의 한 의원은 “오랜 외유생활을 하고 귀국한 아우내외가 짬을 내어 만년의 큰 형님댁을 찾아가 형수님과 함께 식사도 하고, 바둑도 한판 두고, 오락게임도 한판한 것 같은 착각이 든다”고 비유했다.

민주당 유종필 대변인은 “이례적이고, 파격적으로 형식이 내용을 압도한 돌출적 이벤트”라고 깎아내리면서 “호남을 비롯한 DJ지지자들의 마음을 다시 사보겠다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한나라당은 “DJ는 상왕정치를 하려하고, 노 대통령은 호남지역기반을 노린 `떴다방' 행사”라면서도 현재 압도적 우위를 보이고 있는 한나라당의 대선구도 차질을 우려하는 눈치도 보였다.

그러나 역대정권 교체기를 깊숙이 경험한 오래된 정치인들은 “노무현 답다, 종이 호랑이인척 이빨과 발톱을 숨기고 있다가 범여권 중진들을 모조리 덮쳤다. 이제 정계개편과 대선 레이스는 정리정돈된 것”이란 속깊은 관전평을 내놓았다. 이들에 따르면 노 대통령은 자신을 세워준 호남의 `반감'과 `섭섭함'을 누그러뜨리고, `정계개편의 관리 조정권'을 확보하고, 후반기 국정주도의 최소한의 안정성을 확보한 열매를 거뒀다는 것이다. DJ를 한번 방문하고 세가지를 얻었으니, 일석삼조 아니냐는 촌평이다.

상처의 크기와 통증은 다음날부터 즉각 나타났다. 열린우리당, 민주당, 고건 전 총리 등으로부터 전개되던 정개개편론의 회오리가 돌연 약해지기 시작한 것. 범여권발 정계개편의 동력의 공급원이 이상스럽게(?) 끊긴 것이다.

분석가들은 “DJ-노의 만남은 범여권 중진들의 `정치적 실체'를 국민들에게 반영시켰다. 이들은 대중적 지지도의 허상과 여권내부의 형편없는 권력 장악력을 뭉뚱그린 정치적 위상을 드러낼 수 밖에 없었다”는 것. 즉, “떠나버린 호남의 김대중을 대체하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지 못했고, 지지도가 바닥에 떨어진 현직 대통령의 권력을 승계할 채비를 전혀 갖추지 못한채, 정계개편의 구호만 떠들어 댔다”는 것. 따라서 “호남과 중소서민의 상징 김대중과 권력자 현직 대통령의 만남은 이들을 정계개편의 정중앙에서 쓸어내고야 말았다”는 중간 매듭이다.

그러나 이들은 DJ나 노 대통령이 정계개편의 중심에 직접 나선다는 것은 `소설'이라는 지적이다. 국민들이 원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들 스스로가 보폭을 잘 알고 있기때문이라는 것. 여당의 한 고위인사도 “전·현직대통령이 정계개편에 나선다는게 말이되느냐”면서 “차기 대선에 나설 실제적 주자들이 범여권발 정계개편을 주도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겠느냐”라고 지적했다.

결국 DJ와 노의 동교동 오찬회동의 결론은 “상징성을 가진 DJ가 병풍이 되고, 노 대통령은 좌장을 하고, 본선에 나설 잠재력과 대중성을 가진 새로운 얼굴들이 정계개편 논의의 정중앙에 설 수 있도록 정리정돈한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은 역사의 모든 권력자들이 그랬던 것 처럼 임기말 `권력 조정자(power codinater)'로서의 본모습을 드러냈다는 해석이다.

사실, 노 대통령은 9월까지만해도 내년 대선의 `킹메이커'를 자임하고 나섰다. “퇴임후에도 당원으로 남고 싶다거나, 명예고문이라도 시켜달라”는 언급 속에는 킹메이커로서의 자신감이 단단히 깔려 있었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북핵실험은 노 대통령의 권력운용 타임테이블을 완전히 헝클어 놓았다. 또한 보유한 정치적 배터리는 완전히 방전되고, 새로운 내용의 동력으로 충전할 수 밖에 없었다는 해석이다. 따라서 역대 모든 대통령들처럼 킹메이커가 아닌 파워코디네이터로 나섰다는 것이다.

정치권 전략분석가들은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임기말 민선 대통령은 지지도가 15% 안팎에 머물렀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자신이 가진 권력의 조정능력을 극대화시켜 차기 대통령 선거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스스로 권좌에 오른 전두환 대통령은 아예 노태우를 후계자로 지목한 뒤 6·29선언을 시키고, 김영삼(YS), 김대중(DJ) 김종필(JP)과의 4자 대결을 유도했다는 것. 그리고 노태우는 당선됐다.

YS는 주목받던 김덕룡을 제일 마지막까지 청와대 정무수석에 붙잡아 두었다가 타이밍을 빼앗으며 최형우를 쓰러지게했다. 또 깜짝 놀랄만한 후보 이인제를 키워 이회창을 끝까지 괴롭히는 등 여권의 표가 쪼개지는 것을 방조했다는 것, 그리고 DJ에게는 호남출신의 김태정 검찰총장을 시켜 보호했다는 것이다. YS는 DJ의 당선소식을 듣고는 최측근에게 `정말 잘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DJ도 똑같은 길을 걸었다. 2002년 초 이회창과 이인제 양자구도가 성립되고, 이인제-권노갑 밀월이 시작되면서부터 DJ의 속내는 드러났다. 김원기와 정균환으로 하여금 후단협을 만든 뒤 이들을 대표자로 세워 중도적 의원들 70여명을 묶어 놓았다. 이로 인해 대세론을 주장하던 이인제는 의외로 의원들의 세가 모이지 않았다. 이-권은 당황하기 시작했고, 정동영과 천정배는 정풍론으로 치고나왔다. 천정배는 혈혈단신 노무현에게로 갔고, 비로소 노무현이 뜨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을 모두 지켜본 여권고위 현역의원은 “천명은 여야를 막론하고 흘러간다”면서 “정리정돈과 조정자로서의 대통령의 고유한 권한은 국민이 준 권력의 속성”이라고 단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