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가 도읍을 개경(開京)으로 정한 이래 북방 요충지 서경(西京·평양)과 신라의 도읍 동경(東京·경주)의 3경(京)체제가 마련되었다. 이후 남경(南京·한양)을 3경으로 대우하면서 개경과 남경을 잇는 길의 중요성이 커져 갔다.

조선이 남경이었던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명나라가 해상교역을 봉쇄하는 해금정책 탓에 서울에서 개경을 지나 의주로 가는 길이 붐비게 되었다. 북경으로 가는 사신들의 행렬이었는데, 이는 세계로 가는 소통의 길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으로 가는 통신사가 있었지만 조선의 입장에서 이 길은 매혹적이지 않았다. 300년 뒤인 고종 때 일본으로 가는 신사유람단으로 바뀌기까지 북행길이야말로 선진된 문물을 배우는 유일한 통로였다.
다만 한족의 명나라를 찾아가는 것이 `조천(朝天)'이었다면 만주족의 청나라로 가는 것은 `연행(燕行)'이라 불렀을 뿐 실제 내용상 차이는 없었다. 똑같은 북경을 가는 것임에도 `천자를 알현하러 가는 것'과 `연경으로 가는 것'이라는 명과 청에 대한 조선의 양반사대부들의 자기위안이 있었을 뿐이다.


사행길은 단순한 사대적 외교 관계만이 아니라 실질적인 상거래가 동반한 무역이었다. 실제 조선의 상권은 사행로를 따라 번성하였다. 한양의 경상(京商)과 개성의 송상(松商)에 더하여 평양의 유상(柳商), 의주의 만상(灣商)은 대청무역으로 상권을 강화하였다. 일본과 거래하던 내상(萊商)이 동래부에 있었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며 정권을 잡은 서인정권은 반청정책으로 전쟁을 자초하였다. 병자호란은 전격적인 전쟁이기도 했지만 명나라에만 의지한 서인정권에 대하여 백성들은 등을 돌렸다. 이에 병자호란에는 우리 역사의 가장 위대한 존재, `의병' 활동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인조의 삼전도 굴욕으로 조선의 지배층은 청나라에 대한 북벌을 다짐했지만 150여년 뒤에 오히려 그들을 배워야 한다는 북학으로 바뀌었다. 북학론 이후 북경을 가는 연행은 조선의 사대부들의 꿈이 되었고, 그리고 다녀와서는 연행록(燕行錄)을 쓰는 것이 하나의 유행이 되었다. 그 덕에 연행길은 낯설지 않다.
담헌 홍대용(洪大容)의 기록처럼 서울에서 의주까지 길은 1천50리였고, 그 사이 서울에서 고양 벽제관(碧蹄館) 40리, 파주 파평관(坡平館) 40리, 장단 임단관(臨湍館) 30리, 개경 태평관(太平館) 45리였다. 또한 의주에서 북경까지 2천61리의 멀고 먼 길이었다. 그 길을 따라가 보자.
한양의 서대문인 돈의문(敦義門)으로 해서 영은문(迎恩門)의 모화관(慕華館)을 지나 홍제원(弘濟院)으로 향한다. 홍제교 쯤에서 전별 나온 벗이나 친척들과 작별을 하는데, 서로 위로하고 헤어지며 `서글프다느니', `몸조심하라느니' 하는 말로 만 가지 정서를 자아낸다. 이렇게 헤어져 숫돌재를 지나 날이 어둑할 무렵 고양의 읍사인 벽제관에 당도하여 취민당(聚民堂)에서 하루를 유숙한다. 물론 예까지 따라오는 벗들도 종종 있다.

쌍미륵을 지나 나무다리였던 것을 1656년(효종 7) 8월 의승(義僧)들이 돌을 캐고 장인(匠人)들을 모아 돌다리로 만들었던 광탄교(廣灘橋)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곧 윤관장군 묘가 나오는데 길옆에 있는 윤시중 교자총비(尹侍中驕子塚碑)를 더 이채롭게 여겼다.
물론 사대부들은 파평 윤씨·청송 심씨가 다투며 송사한 지 오래된 사실에 더 높은 관심을 표명하곤 하였다. 그리고는 마산역(馬山驛) 뒷고개를 넘어 저녁에 파주 파평관(坡平館)에 당도한다. 파주 관아의 청각루(聽角樓)와 관청 북쪽에 행궁(行宮) 등을 둘러보고 봉서당(鳳棲堂)에서 유숙한다. 파주는 고양과 달리 왕경 인접지의 큰 도시 면모를 보여주는데, 파주의 연회 규모도 비교의 대상이다.
장단을 넘어 자야 한다는 금기가 있어 파평관을 새벽 일찍 출발하는데 그럼에도 임진강을 건너면서 화석정을 찾아 시 한수 읊게 된다. 화석정은 정자의 구조는 작으나 일곱 그루의 전나무가 처마를 둘러싸고 있고 강물 빛이 은은히 비치는데 오른쪽으론 산림의 풍취를 얻었고 왼쪽으로는 강호의 승경을 독차지하고 있다. 중국 사신을 맞이했던 접반사로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쳤던 율곡 이이의 현판 시운(詩韻)을 써서 시를 짓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장단 임단관에서 유숙하고 개경 태평관을 지나 의주로 가는 것이다.
그러나 연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은 의주에서부터 역순이지만 속도는 자못 빠르다. 예를 들면 새벽 일찍 개성을 출발하여 장단까지 40리를 가서 임단관(臨湍館)에서 아침을 먹고, 파주까지 40리를 가서 파평관에서 점심을 먹고, 고양까지 40리를 가서 벽제관에서 자는 행로였다. 하루 120리 길을 간 셈이다.
사행을 해봤던 이호민(李好敏)이 1604년(선조37) 동지정사로 떠나는 윤경립(尹敬立, 1561~1611)에게 주었던 시를 통해 사행의 어려움을 알아보자.
홍제원 홍제교를 떠나면서부터 다양한 인연의 사람이 베푸는 전별연이 시작된다. 모두 술 한 잔만 건배하자고 하지만 잔치가 끝나면 얼마나 마셨는지 모를 정도로 과음하기 일쑤였다. 새벽 속 쓰림으로 깨어 좀 더 머물고 싶지만 관(館) 곡식을 축내기 어려워 떠나면 비몽사몽 상태로 말 타고 가다가 저 곳에 가서도 만나는 사람마다 새 술을 권한다. 누구의 잔은 받고 누구의 잔은 받지 않으랴.
결국 다정(多情)이 병을 만들고 마는 셈이다. 홍제원에서부터 고양의 벽제관, 파주의 파평관, 장단의 임단관을 지나 평안도 땅으로 들어서면서도 끊임이 없다. 압록강변 의주 땅까지 천리 길을 그렇게 간다. 이러한 상태로 의주에 오면 심신은 극도의 탈진상태를 맞아 입안에 한 톨 밥도 들어가지 않으니, 의주에서의 풍성한 전별연도 빨리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다.
압록강을 건너 고국을 떠나는 심회 안타깝고 산 설고 물 설지만 저녁 마석리(磨石里)에서의 잠은 동이 틀 때까지 곤한 잠을 자게 한다. 이제 남의 땅, 술 권하고 편지 찾는 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낯선 이국풍경에 취하며 2천리 북경을 향해 가면서 심신을 추스른다. 북경에서 일을 무사히 마치고 다시 역순으로 압록강 건널 때 마중 나온 의주 부윤은 부사의 얼굴이 하야말쑥함에 놀라게 되는 것이다. 술과 사람들에 치여 당한 고통을 알지 못하는 까닭이니, 어저, 술 권하지 않는 세상에 살고파라. 이렇게 숱한 의례로 점철된 다정(多情)을 무기로 술 권하던 풍경의 조선은 지악스런 외세와 만나게 된다.
중국을 왕래하던 사행로였던 의주로는 1906년 남쪽으로 경부철도와 용산에서 만나고 북쪽으로 신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너 중국의 안동~봉천철도와 연결됨으로써 한반도 서북부 지역을 관통하는 간선 경의철도로 대체되었다.
세계로 가는 통로였던 의주로는 반대로 한국을 매개로 아시아 대륙과 일본을 최단거리로 연결시켜주는 제국주의의 교량적 역할로 바뀌었던 것이다. 경의선 부설 100년, 그 길은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남북으로 분단된 지 60년 만에 경의선을 다시 잇고자 한다.
이제 경의선을 통해 중국과 시베리아를 지나 유라시아 끝까지 가는 날, 근대 100년의 굴욕을 벗어버리는 날, 그날. 그날이 오고 있다.
그래서 의주로 끝, 압록강 철교를 건너 해가 지는 서쪽으로 끝없이 달려가고 싶다.
통일 5주년 압록강 철교 앞에서 만나기로 한 벗들은 지금 강녕들 하신가?
/한동민 수원시 문화관광과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