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곡(七谷) 김숙현(金淑鉉·1917~2003) 선생을 시인 김수복(金秀福·단국대 교수)씨는 '학이 날아간 자리에 무지개 오르네'라는 시로 선생의 업적과 생애를 담아냈다. 이 시는 지난 1997년 3월 칠곡 선생의 팔순기념에 부쳐 '목계(木鷄)의 비상(飛翔)'이란 책에 실렸다.
칠곡 선생은 인천이 자랑하는 큰 어른이었다. 국회의원, 변호사, 학자로서 모든 정열을 인천에 쏟아 붓고 빈손으로 떠난 '부평의 개척자'였다.
그는 원칙주의자였고 적당한 타협은 통하지 않았다. 판단력은 정확했고 늘 빨랐다. 맺고 끊음이 너무 정확해 인간적인 면이 너무 없는 것 아니냐는 일부의 비난도 있었다. 다른 정치인 처럼 유연성만 있었다면 더 큰 인물이 됐었을 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아쉬워 하고 있다.
선생과 인천의 인연은 운명과도 같았다.
선생의 초대 비서관을 지낸 허문명(부평문화원장)씨는 “선생께서 1960년 초 부평에 있는 미군부대(캠프마켓 등) 외국인 기관 근로자 노조의 법률고문을 맡으면서 부평과 인연을 맺었다”고 전했다. 당시 선생은 대한변호사회 인권옹호위원장으로 일하면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운명처럼 다가 온 `부평사랑'은 이렇게 시작됐다. 칠곡은 이후 1962년 민주공화당 창당에 깊숙이 관여하게 되면서 인천 부평 지구당위원장에 취임했다. 선생은 지구당위원장을 맡으면서 곧바로 서울에서 이사를 내려와 세상을 떠날때 까지 부평을 지켰다.
`목계의 비상'에서 조씨가 밝힌 선생의 업적에 따르면 1965년 정부시책의 일환으로 인천에 처음으로 수출산업공단 설치인가가 되자 인천과 부평은 서로 공단유치를 위해 혈안이 돼 있었다. 당시 부평은 미군보급창이 자리잡은 덕분에 서민들의 젖줄 역할을 했었다. 그러나 이것이 철수키로 돼 있어 경제자생력의 빈곤으로 큰 실의에 빠져 있었다.
선생은 부평의 유력인사들을 긴급 소집했다. `수출공단유치추진위원회'를 꾸리고 부지매입을 위한 모금운동에 나섰다. 일억원(현재 10억원 정도)이 넘는 돈을 모아 시민들의 힘으로 땅 수 만평을 매입했다. 그리고 부지선정 책임을 맡은 인천상공회의소 채호 회장과 윤갑노 당시 인천시장을 설득, 1966년 부평공단 유치에 성공했다.
선생은 또 1967년 인천시민들의 문화공간 확보를 위해 또 다시 인천시민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모금운동은 성공했고 부평동 229 중심지에 지상 3층 연건평 370평의 제2공보관을 건립했다. 학자답게 재정부족으로 건축이 중단됐던 부평중학교를 주둔 미군부대와 각계의 도움을 받아 개교시켰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선생은 부평동중과 부평여중 등을 잇따라 설립해 열악한 부평지역의 교육환경을 개선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듯이' 변호사로 서울에서 벌어다 부평에 쏟아 붓기를 무려 8년만인 1971년 제8대(인천 북구)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선생은 국회에 입성해서는 국회법제사회법위원회 간사로 활동하면서 정치인으로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지역을 위해 1972년 국방부 소관이던 7천여평의 땅을 문교부 소관으로 이관시켜 부평고를 설립했고, 법률가로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무료변론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런 선생의 노력은 11·12대 국회의원으로 이어져 국회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 대한산업안전협회중앙회장, 민정당 중앙당 윤리위원장, 한·일친선협회중앙회 이사장으로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5·6공 교체시기던 지난 1987년 민정당 헌법제도특위위원장으로 개헌 기초안을 입안하는 중심에 서기도 했다.
선생은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는 부평에 머물면서 교육계에 정열을 쏟았다. 서인천고등학교 재단이사, 인천교육대학 유치, 학교법인 단국대학교 재단 이사장 직무대행 등으로 일하면서 잠시도 쉬지 않았다.
이런 선생을 두고 김수한(金守漢) 전 국회의장은 `영원한 金靑年'이라고 별호했고, 故 조기준 향토사학자는 `위대한 개척자', 김학준(전 인천대총장 시절) 동아일보 사장은 `인천이 자랑하는 큰 어른'이라고 그를 평가했다. 선생은 2003년 10월 27일 부평 자택에서 86세로 세상을 떠났다.
김숙현선생 약력
▲1917년 4월 14일 평안북도 선천군 군산면 봉산동에서 출생
▲1936년 평북 신성중학교졸업
▲1940년 일본 와세다 대학교 법률학과 졸업 및 신의주법원 근무
▲1946~7년 공산정권 수립되자 월남, 단국대 전임강사
▲1951~5년 육군 고등군법회의 검찰관, 국방부 법무과장(육군 대령)
▲1955년 단국대 형법학 교수
▲1958년 변호사 개업
▲1962년 민주공화당 인천 제2지구당 위원장
▲1971년 제8대 국회의원(인천 북구) 당선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인천 북구) 당선
▲1981년 국회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
▲1982년 대한산업안전협회 중앙회장 취임
▲1983년 민주정의당 중앙당 윤리위원장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인천 북구) 당선
▲1985년 한·일의원연맹 간사장 및 중앙회 이사장
▲1987년 민주정의당 전국대회 임시의장
▲1993년 단국대학교 이사장
<송병원기자·song@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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