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유로는 남·북한을 이어준다는 명분에서는 의주로와 통일로의 기능을 이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총길이 46.6㎞의 자유로는 1992년 제1단계 구간이 개통됐고 지금은 고양·파주 등 수도권 서북부지역의 교통 수요를 담당하고 있다. 사진/조형기전문위원·hyungphoto@naver.com
   61. 의주로 > 6 < - 수많은 발길 유구한 역사

   의주로는 조선시대의 간선도로 중에서 가장 중시되던 도로였다. 18세기 중·후반의 대표적인 지리학자였던 여암(旅庵) 신경준(申景濬, 1712 ~ 1781)은 조선의 대로를 처음 6대로로 명명할 때 의주로에 제1로의 자격을 주었다. 여암이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의주로가 중국에 연결되는 노선이라는 측면을 중시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는 한양을 중심으로 볼 때, 서북로로도 불렸던 의주로가 뻗어나간 방향이 자(子) 방향에 가장 가깝기 때문에 이를 제1로로 삼았을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제1로 이후 제2로부터 제6로에 이르기까지의 번호는 시계방향을 따라 순차적으로 매겨졌고, 이는 12간지(干支)로 방위를 설정할 때의 진행방향과 일치한다. 즉 자방향의 노선을 기준으로 삼아 이를 제1로로 부여하고 오른 방향으로 나머지 대로들에게 연번을 붙인 것으로 이해된다. 어쨌든 의주로는 조선의 제1 도로로서의 상징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부분적으로 노선의 변경이 있긴 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한의 총 49개 일반국도 노선 가운데 가장 번호가 빠른 1호 국도로 지정되어 있다. 물론 국도 1호선은 전국의 국도 가운데 국토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것에서 비롯한 것이기 때문에 내막은 다르다. 하지만 명목상으로는 조선의 명맥을 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의주로는 서울∼개성∼평양∼의주를 잇는다. 서울은 굳이 설명할 필요없지만, 조선 건국 이래 오늘날까지 600년 이상을 한국 제일의 중심지로 기능하고 있으며, 개성은 그 이전 약 500년 동안 고려의 수도로 당대 최고의 중심지였다. 평양 역시 고구려가 남하 정책을 펴면서 새로 옮겨온 수도였으며, 의주는 조선시대에 국토로 편입된 이후 대중국 외교·군사·무역의 첨병도시로 중시된 최고차 국경도시였다.

   총 길이 1천65리에 달하는 의주로는 곳곳에서 분기로가 뻗어나갔다. 경기도 고양군 신원리에서 분기하여 휴암점과 지석리를 지나 교하현에 이르는 길과, 파주 이천리에서 고랑진과 사미천장을 지나고 감물리 고개를 넘어 삭령 및 토산까지 이르는 길, 그리고 개성의 오정문에서 벽란도를 건너 토산현, 이어서 청단역을 경유하여 해주와 옹진에 이르는 길 등 경기 북부와 황해 남부를 잇는 주요 도로가 모두 의주로에서 분기한 것이다. 이밖에도 평양에서는 의주로에서 뻗은 갈래길이 여섯 개나 있었고, 평안도와 황해도 내 주요 군읍들은 모두 의주로와 직접 연결되는 교량선(橋梁線)이 나아 있었다.

   남북 분단 이후 제 기능을 발휘하지는 못하지만 의주로는 역사적으로 국토 서북부의 대동맥으로 가장 중시되는 길이었다. 무엇보다도 의주로는 한민족의 이동 루트였을 가능성이 높다. 현재 한국민을 형성하는 민족의 원류는 청동기시대에 한반도로 이주하였으며, 정확한 이동경로는 알 수 없지만 대체로 압록강 하구 부근을 건너 서부의 저지대를 따라 남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밖에도 두만강 하구를 건너 동해안의 저지대를 따라 경상도 일대까지 남하했을 가능성도 제기되지만 아마도 수적으로는 서해안 루트가 훨씬 많았고, 이 핵심에는 의주로가 있었다.

▲ 호로고루성, 당포성, 은대리성 (왼쪽부터)

   의주로는 또한 조선후기까지 중국의 선진 문화와 생소한 서양 문화를 받아들이는 문화전파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한글 창제 이전까지 유일하게 사용하던 문자인 한자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데에는 의주로가 일차적인 전파로로 이용되었을 것이며, 전근대 가장 폭넓게 포교되어 한국인의 정신세계는 물론 일상생활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불교가 전파되는 데에도 의주로는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밖에도 의식주와 관련하여 의주로가 우리에 전해준 것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전파 경로에 대해 대체적으로 다섯 가지가 제기되고는 있지만 우리가 주식으로 먹는 쌀의 전파 경로 중에는 의주로가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한민족이 처음 한반도로 넘어오기 시작하면서 중앙아시아와 연결되는 청동기문화가 주로 의주로를 따라 전래된 후 각지로 전파되었으며, 더불어 이때부터 수수·조·피 등의 곡물들 역시 의주로를 따라 재배되기 시작하였다. 고려시대에 문익점이 갖고 들어온 목화씨도 의주로를 따라 개성까지 전래된 후 고향인 산청에서 재배되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오늘날에도 일상복으로 가장 많이 입고 있는 면직물의 시원도 의주로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 한양을 출발해 고양 신원리분기점까지 의주로와 노선을 같이한 통일로.
   그러나 의주로는 민족의 이동로나 선진 문화의 전파로로만 기능하지 않았다. 의주로는 오래전부터 북방의 대대적인 군사침입로이기도 했다. 중국 수(隋) 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할 때 그들은 압록강을 건너 의주로를 따라 내려왔으며, 유명한 살수대첩은 청천강을 건너 평양으로 진격하다가 을지문덕의 계략에 빠진 것을 뒤늦게 알고 다시 청천강을 건너 퇴각하는 도중에 일어난 전투였다.

   고려시대에 원나라의 침입로도 의주로를 따라 개성을 향했으며, 고려 조정 역시 의주로를 따라 남쪽으로 장단이나 서울을 경유하여 김포까지 내려온 후 배편을 이용하여 강화도로 피신하였을 것이다. 역으로 조선시대에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북쪽을 향해 임진도(臨津渡)에서 임진강을 건너 의주까지 몽진할 때에 행차를 안내한 것은 의주로였다. 한밤중에 임진강을 건널 때 불을 질러 밤길을 밝혔다는 이야기로 유명한 화석정은 바로 의주로와 임진강 옆에 자리잡고 있다. 이밖에도 역사 속에서 의주로를 따라서는 총 인원이 수 만명을 넘을 것으로 예상되는 중국과 한국의 사신들이 오갔으며,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승려와 문인들, 그리고 개성의 송상(松商)이나 의주의 만상(灣商)들 또한 셀 수 없을 정도로 의주로를 밟았을 것이다.

   임진왜란 뿐 아니라 한국전쟁 당시에도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며 임진강 연안의 전투에서 승리한 북한군은 의주로로 대거 집결하여 서울을 향하였다. 이는 고구려가 남하정책을 펼치면서 475년에 백제의 수도를 함락, 백제에게 한성시대의 막을 내리게할 때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임진강 수로를 따라 남북 연안에 호로고루성을 비롯하여 옛 성터가 지금도 많이 남아 있는 이유는 이러한 맥락에서 쉽게 이해된다.

   현대사에서 의주로가 간직한 아픈 기억은 1979년에도 있었다. 이른바 1980년의 신군부는 12·12군사쿠데타를 통해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한다. 이때 파주와 고양 등 경기 서북부 서부전선을 담당한 제9사단이 중앙청과 광화문 일대까지 진격하여 신군부의 헤드쿼터를 비호하는 임무를 완수할 때도 이들은 의주로를 따라 내려왔다.

   통일로로 불리기도 하는 1번국도는 일제시기에 경의선 철도와 의주~목포간 신작로 건설 사업의 영향으로 서울 구파발에서 벽제~봉일천~금촌~문산을 지나고 있으며 분단 상황 때문에 자유로의 자유IC까지만 나아 있다. 이 경로는 조선시대의 의주로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으나 대체적으로 벗어나지 않았다고 판단해도 큰 무리는 아닐 듯 싶다.

   우리 민족사와 가장 인연이 깊은 도로의 하나인 의주로는 파란만장한 역사를 담고 있는 일종의 유물이다. 그것도 죽어서 박물관에 박제된 유물이 아니라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역사적 유물이다. 더구나 통일 한국을 예상하면, 분단과 1번국도로 잠시 위축된 의주로는 언젠가 다시 옛 영화를 누릴 날이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김종혁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