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활주로가 녹아내릴 듯한 폭염의 여름날이었고 30대 초반의 한 일본인 비즈니스맨이 비행기 트랩을 밟고 내려왔다. 그의 손에는 손때묻어 낡은 서류가방 하나가 들려있었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출구를 나오자 거래처에서 보낸 검정색 마크Ⅳ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사내가 탄 자동차가 허허벌판 김포공항 일대를 벗어나 도심으로 들어서자 머리띠에 피켓을 든 대규모 시위군중과 몇번인가 마주쳐야 했다. 이날은 그해 8월 15일 광복절 기념행사에서 대통령 영부인이 흉탄에 운명을 달리한 지 5일째 접어든 날이었다.
국모로 추앙되던 육영수 여사의 어이없는 죽음으로 나라 전체는 슬픔에 잠겼다. 한편에서는 연일 규탄집회가 열려 거리 민심은 흉흉했다.
일본인 사내의 한국에대한 첫 인상은 성난 시위대와 맞닥뜨린 공포로 남았다. 이런 기억은 10여년이 지난 80년대 후반에는 민주화투쟁과 노사분규 파업현장·학생운동 등으로 최루탄 연기 속에서도 피어올랐다.
그렇게 한국과 인연을 맺은 30대 초반의 일본인 사내는 한국에 30년을 넘게 살면서 초로의 노인이 됐다. 한국 중소 제조업체에 프레스 기계를 팔고 작동법을 알려주는 기술 자문을 위해 한국에 출장왔던 30대 젊은이는 인천에서만 20년을 넘게 거주하면서 그가 직접 기계부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제조업체의 최고 경영자가 됐다.
인천 동구 만석동에 지난 1987년 자리를 잡은 한국닛켄(주) 와카이슈지(若井脩二·67) 사장이 그 주인공. 한국닛켄은 현재 직원 79명이 작년 기준으로 연 매출액 128억원을 기록한 탄탄한 성장세를 지속하고 있다.
"처음 한국에 들어와 숙소로 가기 위해 명동 성당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카빈총을 든 경찰들이 길을 막고 검문을 하는 거예요. 여권을 제시하고 호텔로 들어설 수 있었지만 그 싸늘한 시선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습니다." 와카이 사장은 한국에 처음 발을 디뎠던 1974년 8월의 한국의 첫 인상을 유창한 한국말로 회상했다.
그는 서울 구로동·고척동·대림동 일대와 인천·부천을 오가며 국내 중소 제조업체에 공작기계를 팔았다. 와카이 사장이 광명시 철산동 K프레스 제조업체에 처음 판매한 공작기계는 대당 가격이 당시 엔화로 500만엔 가량 됐다.
"한국으로 떠나오기 전에도 한국의 국내 사정을 알고 있었기에 가족들은 떠나는 것을 말렸어요. 하지만 기계를 팔기로 이미 약속돼 있었고 시운전까지 해주어야 했어요. 무엇보다도 내가 가진 기술을 한국 기술자들에게 가르쳐 준다는 자부심도 대단했습니다."
와카이 사장은 1년의 반은 공작기계 기술 고문으로 한국에 나와 있고 또 나머지 절반은 일본에 머물면서 한국과 일본을 10여년 오가는 생활을 계속했다. 그러던 중 주식회사 닛켄공작소의 제안을 받아들여 인천 만석동에 1987년 한국닛켄을 설립하고 부사장으로 취임했다.
현재는 '세계화'의 구호 아래 지방자치단체까지 외국 투자 유치에 나서고 있지만 1980년대 중·후반까지도 한국은 외국인들이 국내에 투자하는데 상당히 규제가 심했던 시절이었다. 이에 따라 한국닛켄도 설립 당시 100% 일본 자본이 아닌 한국 자본 15%를 형식적으로 넣어서야 설립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일본은 이미 20년전 해외로 눈을 돌린 반면 한국은 상대적으로 폐쇄적이었다. 인천이 현재 송도국제도시와 청라·영종경제자유구역에 외국 투자를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지만 외국 자본이 들어올 확실한 유인책이 있는 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와카이 사장은 한국닛켄에 근무하고 있는 근로자들과 지역주민들과의 화합을 강조한다.
와카이 사장 자신이 만석동운영위원으로 동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한편 만석초등학교 씨름선수단 후원회장을 맡아 어린 씨름 선수들의 먹성과 입성을 챙긴다. 특히 신입 직원을 채용하면서 이력서의 경력을 채용기준으로 삼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일본 기업들이 100년, 200년 한 지역에서 뿌리를 내리고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은 기업이 지역주민들과 화합해 존경과 사랑을 받는 것이었다. 직원들을 채용하면서도 어디서 무엇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할 수 있는 공평한 기회를 주기 위해서는 이력이 아니라 앞으로의 가능성을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현재 인천에는 가스레인지를 전문으로 생산·판매하는 린나이코리아를 비롯 드럼세탁기용 세제를 생산하는 CJ라이온스, 르노삼성자동차에 부품을 생산·납품하는 파이오락스, 한국특수잉크 등 24개 업체가 일본 자본 투자업체로 분류된다. 이들은 지난 1997년 3월 한 상사 주재원이 병원에 입원한 것을 계기로 결성돼 현재까지 2개월에 한번 꼴로 50여명이 모임을 이어오고 있다.
이들은 모임에서 인천지역 경제를 포함해 한국 경제 현안과 최근 북한 핵실험 사태 등 국내 안보정세까지 다양한 화제를 두고 토론을 이어간다. 이들 모임에는 주일대사관에서 참사관급 이상은 꼭 함께 참석해 일본 기업인들의 의견을 청취한다.
"지난 모임에서는 대사가 자리를 함께 하려고 했으나 북 핵실험 사태 이후 한국의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어 참석하지 못했다. 외국인의 눈에 비친 한국의 모습은 아직도 북한과 전쟁을 하고 있는 나라이다. 해외에서 기업하는 기업인들의 사적인 자리에까지 참석해 챙겨주는 일본 정부에 감사한다."
와카이 사장의 인천 사랑은 남다르다. 한국닛켄이 설립된 1987년 당시 업무용 자동차로 르망을 구입했고 프린스까지 20년 동안 일본 본사의 일제차 구매 요구도 뿌리치고 줄곧 대우자동차만을 타고 다녔다. 현재는 일본 본사의 요구와 거래처의 간곡한 부탁에 더해 무엇보다도 초로(初老)의 사장을 걱정하는 직원들의 강요로 일제 자동차를 구매해 타고 있다.
와카이 사장은 앞으로 10년 후 쯤에 지금의 한국인 전무이사에게 회사 경영권을 넘겨 줄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래서 일본 본사 회의에도 자신이 아닌 한국인 전무를 보내면서 일본 본사와 교류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직원들이 늦게 출근해도 좋으니 사장님이 매일 출근하라고 합니다. 일본 본사와의 바람막이 역할을 원하는 것은 아닌가. 일본 본사보다도 일본인 사장을 믿고 따라 준 한국 직원들을 더 고맙게 생각한다"고 호탕하게 웃었다.
은퇴 후에는 도자기 공예로 인생 제3막을 준비하고 있다는 와카이 사장은 "도자기는 흙과 물, 불에 영혼을 버무려 만드는 인간 영혼의 정점"이라며 "과거 일본인들이 고려 백자에 혼을 빼앗긴 이유를 알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일본에서 보낸 30년 이후 한국에서 보낸 30년 동안 참으로 보람되고 즐거웠다"며 "인천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늘 간직하고 살아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