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이후 123년. 개항장이었던 인천은 이 세월동안 전국의 어느 도시보다 숨가쁘게 달려왔다. 이제 인천은 항만과 국제공항, 경제자유구역이란 삼두마차를 앞세워 동북아 물류중심 도시를 향해 화려한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100년 조금 넘는 짧은 기간 동안 무서운 변화를 이끌었던 인천의 핵심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다가오는 미래에는 무엇이 인천을 더욱 펄떡거리게 할 새로운 심장으로 부상할까. 경인일보는 새해를 맞아 지금까지 인천을 이끌었던 원동력을 되돌아보는 한편, 미래를 좌우할 새로운 성장동력을 모색하는 공간을 마련한다. <편집자 주>

농업·수산업 대신 상업이 경제키워드로
일제 병참기지로 변질… 공업도시 변화

1. '인천, 역사에 명함을 내밀다.'(개항기∼1950년대)

 
 
 
  ▲ 개항 20년 후인 1904년 인천 제물포 앞 바다.  
 
이전까지 농업과 수산업에 의지하며 근근이 명맥만 유지했던 촌동네 인천은 지난 1883년 개항과 함께 일약 근대사의 주역으로 떠오른다.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이 방증하듯 이는 자의에 의한 등장은 아니었다.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바다였기에 인천이 선택됐을 뿐이다. 하지만 개항은 인천지역 경제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농업과 수산업이 지고, 상업이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으로 떠오른 것이다.

인천은 일제강점기 '전국 최대 미곡 집산지'란 수식어가 붙어다닐 정도로 미곡 수출지로 이름을 날렸다. 당시 인천항을 통해 미곡은 일본외 중국 각 지역으로까지 수출됐다. 미곡 수출이 늘어나며 정미업도 번창했고, 오늘날 증권시장처럼 미곡을 거래하는 미두장도 급속히 세를 넓혔다. 물론 미곡 거래와 관련된 산업은 일본인들에 의한 것이었다. 상업이 인천을 움직이는 동안 대부분 인천시민의 몫으로는 항만근로가 돌아왔다.

일본인들에 의한 상업은 우리 입장에서는 산업이 아니라 수탈과 다를 바 없었다.

 
 
 
  ▲ 1928년 인천항에 접안한 선박에 미곡을 싣는 모습.  
 
1930년대 일본의 중국 침략이 가속되며, 인천은 병참기지로 새롭게 태어난다. 경인철도와 인천항 제1선거가 갖춰진 인천은 일본이 중국 대륙으로 들어가는 발판 역할을 했다. 동양방적과 현 대한제분 및 삼화제분을 비롯해 대규모 중공업 공장들이 여기저기 들어서며 인천은 공업중심 도시로의 변화를 맞는다. 특히 군수물자를 만들어내는 식품공업과 기계·금속공업 등의 성장이 두드러졌고, 이것들은 최근까지도 인천산업의 밑걸음이 됐다.

해방이 되며, 미곡 수출이 끝났다. 일본이 쫓겨나며 그동안 세워진 공장들은 폐허로 변했다. 이런 상황에서 6·25전쟁이 터졌고, 인천은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무대로 세계 전쟁사에 한 획을 긋는다. 전쟁은 휴전으로 일단 마무리되고, 초토화된 인천 앞엔 힘겹기만 한 50년대가 놓여져 있었다.

결국 개항기부터 1950년대까지 인천을 움직였던건 강제 개항에 이은 일제의 수탈, 6·25전쟁이 만들어낸 전략적 요충지였다는 것 등으로 모아진다. 이 시기 인천의 중요한 성장 동력 중 긍정적인 것을 찾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인천이 근대사에 명함을 내밀긴 했지만 결코 당당할 수만은 없는 이유다.

亞최대 '인천항 갑거' 물류거점 촉발
공단조성 가속… 자동차 중심지 도약

2. '인천항 경제를 부탁해.'(1960∼1970년대)


 
 
 
  ▲ 1969년 7월 21일 경인고속도로 1차 완료.  
 
지난 1966년 인천항 전면 갑거(dock)공사가 시작됐다. 인천항 앞바다를 막고 갑문을 설치하는 아시아에서 최초로 시도된 대역사였다.

1960년초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열매를 맺으며 인천에도 점차 화물이 증가, 인천항은 선거 확충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착공 8년만에 인천항엔 5만t급과 1만t급 갑거 1개씩을 갖춘 내항이 확보됐다. 내항에는 5만t급 선박을 비롯한 대형 선박 18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부두가 만들어졌다. 여기에 국내 최초의 컨테이너 전용부두도 한켠에 조성됐다. 내항이 완성되며 인천항의 연간 하역 능력은 기존의 4배 정도인 627만t으로 확대됐다.

현재는 갑거가 하역료를 상승시키는 계륵으로 전락한 면도 없지않지만 당시만 해도 이는 조수 간만의 차를 뛰어넘기 위한 의지의 승리였다.

악천후시에도 선박의 안전을 보장하는 아시아 최대 규모 갑거 완성은 자의든 타의든 인천항에 인천 경제의 키를 쥐어준 셈이다.

 
 
 
  ▲ 1973년 착공되어 3년 9개월만에 완공된 한국수출5단지 전경.  
 
인천항이 제 모습을 갖추자 항만을 좇아 인천에 대규모 공단들도 속속 둥지를 튼다. 1970년대초 부평공단이 조성됐고, 이어 주안공단도 자리를 잡는다. 펄프가 인천으로 수입되기 시작했고, 1970년대들어 간헐적으로 들어왔던 컨테이너 화물도 1975년부터는 전용선을 타고 정기적으로 인천항을 찾게 됐다. 인천항운노동조합 최정범 위원장은 "1974년 갑문이 개장되던 그 때가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며 "공단이 속속 조성되며 인천이 공업도시로 발전하게된 건 인천항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당시 인천항의 위상을 평가했다.

한편 이 시기 인천에선 자동차 산업이 또다른 성장축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1962년 부평에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 대량 생산 공장 '새나라자동차'가 세워졌다. 68년초엔 부평에 대지 50만평, 연 1만5천대 생산 능력을 갖춘 공장이 가동되며, 인천은 일약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로 떠오른다.

직할시 승격…지역경제 기반확충
원자재·제품 수송 이점 목재업 성황

3. 한국 가구업체 90% 이상 인천으로 (80년대)


1980년대의 인천 경제는 직할시 승격과 행정구역 확대 등으로 지역경제 기반이 확충되고 내실화를 다지는 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81년 7월 1일 직할시로의 승격은 시 재정의 집중적인 지역투자가 가능하게 되었다.

해방전 인구 20만명이던 인천의 인구는 직할시 승격 당시인 1981년에는 114만1천여명으로 5.7배 가량 증가해 있었다.

1985년에는 수도권내에 위치한 용도지역 부적격 업체를 이전시키기 위해 전국 최대 규모의 중소기업전용공단인 남동공단을 조성하게 됨으로써 공업입지난 해결은 물론 인천지역의 산업경제 발전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게 됐다. 중소목재가공단지와 경인주물공단 등도 이 시기에 이루어짐으로써 인천의 공업력을 전국 2위로 끌어올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89년 옹진군의 영종도·용유도와 김포군 계양면이 인천에 편입돼 인천 면적은 208.32㎢에서 313.4㎢로 50.4%가 늘어나 시세 확충이 급격히 진행됐다. 인천시의 예산만보더라도 1982년 1천383억8천400만원에서 1989년에는 5천273억3천600만원으로 3.8배나 증가했다.

제조업의 경우도 1천732개에서 3천539개로 2배, 총생산액은 4조2천797억원에서 12조3천840억원으로 2.9배 성장하는 등 괄목할만한 급신장을 이뤄냈다.

인천은 항만도시로서 원자재와 제품의 수송이 용이하고 배후에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의 넓은 소비시장을 갖고 있어 목재관련업이 크게 발달했다. 이 시기 전국 목재관련업에서 인천이 차지하는 비중은 40% 이상을 차지했으며 대규모 가구업체가 인천에 90% 이상 몰려있었다.

인천시 김기완 경제정책 과장은 "80년대 인천지역 경제에서는 무엇보다도 직할시 승격을 꼽을 수 있다"며 "인천시는 직할시가 되면서 경기도의 감독을 벗어나 직접 중앙정부의 감독을 받게됨으로써 행정의 이원화에서 오는 불편을 덜게 됐고 행정의 신속화와 독자적인 도시개발을 추진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광역시로 재출발! 수출전진기지 급부상
유통·금융업 확산… 균형잡인 도시개발

4. 대형 백화점 중심 유통업 발전, 경제 호황기(90년대)


인천은 1960년대 이후 정부의 강력한 수출진흥 정책에 따라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전국 생산의 5% 이상을 점유하는 공업도시로 발돋움했다. 이러한 산업의 발전은 1990년대 전반에도 지속되었는데 1990년대 전반은 이전과는 달리 제조업만의 발전이 아니라 유통·금융산업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1990년대 전반의 인천 경제는 균형적인 국제산업도시로 발전하기 위한 기틀을 마련했으며 이는 1981년 직할시 승격에 이어 1995년에는 광역시로 재출발하면서 가능할 수 있었다.

1992년 인천의 지역 총생산액은 11조9천352억원으로 1985년 총생산액 3조3천866억원보다 252.4% 증가했다. 전국 총생산액의 5.0%로 1985년의 4.3%에 비해 0.7%p 증가한 것으로 전국에서 인천 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특히 1인당 총생산액은 611만6천원으로 1985년 237만7천원보다 257.3% 증가해 경남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1993년 인천의 경제활동 인구는 80만4천명이며 이중 취업자가 77만7천명으로 실업률 3.4%인 것으로 나타나 전국에서 실업률이 가장 낮았다. 2006년 11월 현재 인천지역 실업률은 4.0%로 서울(4.3%)을 제외하고 전국에서 실업률이 가장 높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 시기 전통 제조업 중심이었던 인천지역 경제에 대형 백화점이 연이어 들어선 것은 주목할 만하다. 독자적인 상권을 형성하지 못해 서울지역에 종속되고 대형 매장이나 다양한 상품의 부족으로 시민의 구매 욕구를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하던 지역내 유통산업은 1990년대 들어서 유통산업의 현대화에 박차를 가하면서 점차 발전의 속도를 높이고 있다.

1990년 3개에 불과했던 대형 백화점은 1991년 이후 이마트·신세계백화점·롯데백화점 등이 연이어 개점하면서 소비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치열한 판매 경쟁을 보이고 있으며 그 성장세는 도시화와 더불어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IMF… 그 끝나지 않을듯한 악몽 탈출
'BUY INCHEON' 새로운 시대의 개막

5. IMF의 시련을 딛고 경제자유구역으로 비상(2000년대)


 
 
 
  ▲ 2001년 8월 민관이 한마음으로 대우자동차 부평공장 살리기 시민캠페인 전개.  
 
밀레니엄 시대의 첫 해는 1998년 IMF 구제금융 사태의 여진이 채 가시지 않은 불안함을 안고 맞을 수 밖에 없었다. IMF 사태를 겪으면서 인천은 지역 주민과 상공인이 힘을 모아 설립했던 지역 대표 은행인 경기은행을 비롯 신세기투자신탁(주), 국제생명보험(주), 쌍용투자신탁(주) 등 지역 금융기관의 붕괴와 많은 중소기업들이 퇴출당하게 된다. 또 외환 위기의 고통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대우그룹의 붕괴는 인천 경제를 더욱 힘들게 했다.

 
 
 
  ▲ 항공기에서 촬영한 인천항 갑문. 인천경제의 많은 부분이 인천항에 의존하게 됐다.  
 
하지만 3년이 흐른 2003년 10월 15일 오전 인천국제공항내 정부합동청사에서는 인천경제자유구역청 개청식이 열렸다. 이날 개청식에는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 김진표 경제부총리, 오벌린 주한미국상공회의소 회장, 마르코스 고메즈 주한EU상공회의소 회장, 배순훈 동북아경제중심추진위원장, 안상수 시장, 시의회 의장, 지역 국회의원 등 500여명이 참석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한국 경제가 또 한단계 도약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할 과정이 동북아 경제
 
 
 
  ▲ 청라경제자유구역은 눈부신 인천경제발전의 시험대로 평가된다. 사진은 청라경제자유구역 조감도.  
 
중심 국가인데 그 핵심 사업이 인천에서 시작된다"며 인천경제자유구역청 개청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인천시는 지난해부터 'BUY INCHEON' 프로젝트를 전개해 오고 있다. 100조원대에 이르는 개발사업의 현장에 많은 투자자들과 기업들이 큰 꿈을 이루라는 얘기다. 그래서 인천은 '황금알을 낳는 도시'로 불리고 있다.

인천시는 이러한 대규모 개발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오는 2008년까지 현재 전국의 4.7%인 인천의 GRDP를 10%대로 끌어올리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경제자유구역 건설에 따른 유발 효과로 매년 GNP 1% 상승과 2~3%의 실업률 감소를 목표로 세웠다. 이는 대규모 개발사업의 부가가치가 그만큼 크고 성공시킬 자신감도 있다는 얘기다.

안상수 인천시장은 "경제자유구역의 개발 효과를 기존 구도심에 흡수·확산시켜 인천을 새롭게 탈바꿈시키고 시민 복지와 삶의 질 향상을 끌어들이겠다"며 "인천은 문명사적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21세기에 들어와 새로운 희망과 주도적 변화의 중심에 설 수 있는 기회를 맞고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