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출신으로 국내 현대수필의 개척자로 평가받으면서 해방기 문학비평 분야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김동석(1913~?).
이 김동석이 '정보의 바다'라는 인터넷에서조차 철저히 외면받고 있다. 아니 왜곡된 채 세상에 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몇 안되지만 김동석 연구자들에게 현재의 잘못된 인터넷 정보는 땅을 칠 노릇이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용한다는 4곳의 인터넷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김동석'을 쳤다. 인물정보란에 문인 김동석이 뜬다. 그 설명을 보면 정말 가관이다. 어떤 곳엔 한국의 좌익계열 문학 평론가로 경기도에서 태어났고, 1950년 월북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생몰연대 없이 대한민국 정부수립 전후에 월북했다고 소개하는 사이트도 있다. 또 다른 곳은 경기 인천에서 1913년 9월 25일 태어났으며, 6·25 전쟁 전에 월북해 전쟁 때 인민군 소좌 신분으로 서울에 나타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적고 있다. 가장 긴 설명을 하고 있는 곳에서조차 김동석의 인생 초기를 그리면서 '경기 부천 출생으로, 인천공립보통학교를 거쳐 인천상업학교에 입학했다가 뒤에 중앙고등보통학교에 편입했다'고만 기술하고 있다.
현재 사람에게 정보를 제대로 주기 위해선 당시의 경기도 주소를 오늘의 인천으로 바꿔 얘기하는 게 맞다고 본다. 또 최소한의 노력만 기울여도 관련 연구물을 찾아 충실하게 김동석 정보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신속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인터넷 포털 4곳이 한 인물을 소개하면서 어떻게 이렇게까지 다르게 할 수 있는지 한심스러울 뿐이다. 틀린 정보를 제공하는 것보다는 아예 빼놓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러한 김동석에 대한 인물정보 왜곡현상은 우리 문단의 비뚤어진 단면을 그대로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월북했다는 사실만 갖고 그는 지금까지 '해방기 좌익측 소장비평가'로만 묻혀 있었던 것이다.
김동석 연구는 고향 인천에서 10여 년 전부터 본격 시작됐다. 김동석의 생애사를 입체적으로 복원할 수 있는 그의 부친 김완식(金完植) 제적등본(민적부)이 세상에 드러난 게 1995년이다. 인천문화재단 사무처장을 맡고 있는 이현식씨가 '황해문화' 1994년 여름호에 '김동석 론'을 발표하면서 그의 부친이 김완식이란 사실을 알렸고, 이를 본 인하대 석사과정에 있던 이희환씨가 '김완식'이란 이름 석자를 갖고 중구청에서 제적등본을 찾고, 결국 김동석의 인생 초반을 조명한 것이다. 이는 이희환씨의 석사논문 '김동석 문학연구'로 빛을 발했다.
김옥돌이란 아명을 찾아낸 것은 김동석 생애 연구의 기폭제로 작용했다. 그의 초등학교 시절 학적부를 찾을 수 있는 '보물'이었기 때문이다. 이희환씨는 창영초등학교(옛 인천공립보통학교) 1928년 18회 졸업생 중에서 '김옥돌'의 학적부를 발견했다. 여기엔 그의 주소, 생년월일, 입학전 경력, 졸업연도, 보호자 직업, 학년별 학업성적, 신체발달상황 등이 훤히 나와 있다.
학적부엔 김옥돌이 입학 전에 서당에 다녔으며, 주소지는 외리 134번지로 돼 있다. 또 부친의 직업란엔 '포목잡화상'(布木雜貨商)으로 기록돼 있다. 또 재학 중 사고로 학교를 빠진 적은 없고 2학년 때 14일, 5학년 때 4일, 6학년 때 1일 등을 질병으로 결석했다. 성적은 모든 과목에서 상위 점수를 받았다. 학년 평균으로 볼 때 10점 만점에 1~3학년 9점, 4~6학년 10점이었다. 특히 조선어는 3학년(9점)을 제외하곤 모두 10점을 받았다.
이현식씨의 글에서 시작한 김동석 연구는 결국 고향 인천에서 석사논문으로 성과를 냈고, 그 뒤 많지는 않지만 몇 편의 김동석 관련 글이 뒤를 이었다. 특히 최근엔 부산 해양대의 구모룡 교수가 '김동석 비평선집' 출간을 앞두고 있다고 한다.
김동석 연구의 근간은 결국 이름 석자가 가져온 셈이다. 김동석의 부친 김완석이란 이름과, 이를 통해 김동석의 아명 김옥돌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학계의 연구작업이 온갖 정보가 쏟아지는 인터넷상에선 여전히 반영되지 않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김동석이 인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한 것은 그의 나이 10세 때인 1922년 4월이다. 다소 늦은 입학이었다. 아버지가 포목잡화점을 경영해 집안이 경제적으로 안정된 시기에 시작된 학창시절은 김동석에게 '나팔꽃 넝쿨처럼 뻗어가는' 꿈을 키우던 시기다.
크레용을 사주지 않는 아버지를 원망하며 내손으로 크레용을 만들겠다고 초에다 물감을 들이려 했던 보통학교 1학년 때의 기억(수필 '크레용')이라든가, 월미도에서 갈매기와 흰 범선과 수평선을 바라보며 가진 낭만과 동경(수필 '해변의 시'), 사기등잔불 밑에서 방바닥에 배를 깔고 '어린이'니 '별나라'를 읽던 일(수필 '나의 서재'), 시계포가 많던 동네를 나다니며 미지의 세계를 꿈꾸던 일(수필 '시계'), 애관극장에서 보았던 활동사진의 영향(수필 '토끼') 등은 모두 소년 김동석에게 삶의 귀중한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라고 이희환씨는 확신하고 있다.
동석이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상업학교(인천고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한 것은 1928년이다. 그는 수필 '봄'에서 서울로 통학하는 학생들과 동창생에 대한 부러움과 자기자신의 옹졸한 처지를 토로하는 회고를 한다. 그의 뜻과는 달리 아버지의 권유로 인천상업학교에 진학했던 것으로 보인다.
1928년은 조선에서 학생운동이 맑시즘의 영향을 받아 조직적이고도 치밀하게 전개되던 시기다. 3학년 때인 1930년 겨울, 친구 김기양, 안경복 등과 광주학생의거 1주년 기념식을 주도해 퇴학당한다. 그러나 당시 일본인 교장(向井最一)은 그의 재능을 너무 아깝게 여겨 서울의 인문계 학교인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추천한다. 이 때 퇴학과 전학(편입)은 그의 인생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된다. 상업학교 시절 막연히 동경하던 경성이라는 보다 큰 세계로 나아가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는 중앙고보를 졸업(24회)하고, 그 학교에선 유일하게 당시 입학하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는 경성제대에 거뜬히 입학한다. 1933년이다.
김동석의 공식적 문학활동은 대학시절에 시작된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37년 9월에 동아일보에 발표한 최초의 글 '조선시의 편영'은 김동석이 학위논문으로 연구하던 매슈 아놀드의 문학관에 기대어 당대의 한국 현대시를 비평한 글이다. 그는 여기서 '부정(否定)만을 일삼는 것은 비평의 본도가 아니다'는 비평관을 피력한다.
1938년 경성제대 본과를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한 그는 모교인 중앙고보에 영어 촉탁교사로 부임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선 보성전문학교(지금의 고려대) 전임강사로도 출강한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을 도발한 일제의 억압 아래서도 그의 문학혼은 치열했던 듯 하다. 이희환씨는 "그는 골방에서 한글로 시와 수필을 마치 '지하운동'하듯 썼다"고 할 정도다.
해방의 벅찬 감격도 그에겐 오래가지 않았다. 해방을 맞아도 일본군대가 남아있는 어수선한 시국은 계속됐고, 정국은 혼미를 거듭했다. 좌우익의 갈등은 점차 깊어졌다. 이런 와중인 1945년 12월 잡지 '상아탑'을 창간한다. '상아탑'은 1946년 6월 7호까지 발간된다. 그의 문학적 기저를 '상아탑의 정신'으로 요약하기도 하는데, 이 상아탑의 정신은 좌와 우를 막론하고 조선문학의 건설을 위한 지식인의 사명과 문화의 역할 강조에 있다.
또 한가지 유명한 것은 우익의 대표적 논자인 김동리와의 '순수문학 논쟁'이다. 이 논쟁 탓에 그는 아직까지도 그저 '좌익계열 문학평론가'로 낙인찍혀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38선이 굳어지던 1948년 '서울타임즈'의 특파원 자격으로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취재차 김구 주석과 함께 평양을 방문한다. 이때 평양방문에서 본 북측의 모습이 김동석을 월북하게 만든 동기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확실치는 않지만 1949년 여름에 김동석이 월북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1949년 5월 '희곡문학'에 발표한 문예수필 '쉐익스피어의 주관(酒觀)'과 태양신문 5월 1일자에 나온 수필 '봄'이 그동안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던 그의 공식적 지면에 등장한 마지막 글이기 때문이다.
김동석이 가족과 함께 월북한 이후의 기록이 없지만 이현식씨는 1958년 남파됐다 수감 중이던 이구영씨와의 1996년 인터뷰를 근거로 월북한 김동석이 북측에서 활동하다 남로당 숙청 때 처벌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 현대문학의 실천적 측면을 유난히 강조하고, 몸으로 실천했다는 김동석에 대한 정확한 연구가 필요한 대목이다.
<정진오기자·schild@kyeongin.com>정진오기자·schild@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