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경숙 교수가 오빠 배인철의 옛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면서 추억하고 있다.


   희수(喜壽)의 노교수는 60년 전의 기억을 또렷이 떠올렸다.

   "어머니는 병풍 뒤 관속에 누워 있는 오빠를 향해 '너도 나라를 위해 일했지만, 쏜 사람도 나라를 위한다며 그런 것 아니겠냐'고 말씀하시는 것이에요. 어머니의 그 얘기를 듣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어요. 너무나 태연하신 그 말씀에, 또 우익테러를 확신하시는 그 모습에 두 번 놀랐습니다." 인천시 남구 도화동 '아세아여성법학연구소'에서 만난 배경숙(77) 인하대 법대 명예교수는 1947년 5월 있었던 셋째 오빠 배인철(裵仁哲·1920~1947)의 갑작스런 죽음이 당시 김두한 일파에 의한 테러 때문이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직도 말하기가 꺼려진다"면서 말꼬리를 흐렸다.

   오빠는 뒷머리 위쪽에 총격을 받고 사망했는데, 장소가 남산이었어요. 그 곳은 김두한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곳입니다. 큰 오빠(배인복)는 많은 돈을 써가면서 범인을 잡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겐 2중 3중의 고통이었습니다."

   당시 급격한 우경화의 바람잡이를 하던 경찰은 사흘만에 '치정에 얽힌 살인'으로 수사를 종결지었다고 한다. 배인철이 총에 맞을 때 당시 이화여대 문과 2년생이던 김현경이 있었는데, 김현경은 나중에 시인 김수영의 부인이 됐다. 김수영은 이 때 배후인물로 지목돼 경찰조사도 받았다고 한다.

   해방공간에서 우리에게 '흑인시'란 장르로 억압받는 소수자를 대변하던 젊은 시인 배인철은 그렇게 짧은 생을 마감했다.

   시인 김광균과 임호권이 쓴 배인철 추모시는 당시 문인들의 슬픔이 어떠했는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주안(朱安) 묘지 산비탈에도 밤버레가 우느냐/너는 죽어서 그곳에 육신이 슬고/나는 살아서 달을 치어다보고 있다.//…//번역한다던/리차드 라잇과 원고지 옆에 끼고/덜렁대는 걸음으로 어델 갔느냐/철쭉꽃 피면/강화(江華) 섬 가자던 약속도 잊어버리고/좋아하던 쫀슨 뿌라운 테일러와/맥주를 마시며/저세상에서도 흑인시를 쓰고 있느냐,//해방 후/수없는 청년이 죽어간 인천땅 진흙밭에/너를 묻고 온 지 스무날/시를 쓴다는 것이 이미 부질없고나."-김광균의 '시를 쓴다는 것이 이미 부질없고나' 중.

   "그 모습 별처럼 꺼졌는가/니그로의 시인아/빛깔을 통해/약소민족의 슬픈 노래하던/그대 육체란/흑인부대 실은 열차이던가/남기고 간 많지 않은 시편들은/목메어 외치던/서글픈 기적 소리//…//색(色) 있는 비애/테프는 끊기지 않았는데"-임호권의 '검은 슬픔' 중.

   스물 일곱의 한창 나이에 총탄에 스러져 간 배인철은 부유한 집안에서 성장했지만, 늘 소외계층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 또 짧지만 치열한 삶을 살았다.

   해방직후 인천에서 발간되던 대중일보 지면에 나타난 '배인철'이란 이름 석자는 그의 당시 지역 문화·예술계에서의 위상을 실감케 한다.

   대중일보 1945년 10월 22일자(제16호) 1면엔 '신예술가협회 제물포에 탄생'이란 제목의 기사를 싣고 있는데, 이 단체의 대표자가 바로 배인철이다. 또 회원 중엔 서정주도 있고, 조규봉, 함세덕 등 대표적 '인천인물'도 있다. 특이한 점은 레이몬 푸렌이나 린우드 이 뿌라운 등 외국인 이름도 나온다.

   신예술가협회를 소개하는 기사는 이렇다. 국제문화의 교류도시로서 앞날이 총망되는 인천에 신예술가협회가 탄생됐고, 이 협회에서는 기관지로 문예미술, 연극, 음악 등 예술부문의 지도향상을 위해 '신예술'이란 문예 문화종합잡지를 발행키로 했다. 또 미술전람회를 개최하고,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 의장 임화 등 각 부문의 대표를 초빙해 문화강연을 열기로 했다는 것이다.

▲ 해방직후 배인철(오른쪽)의 당당한 모습. /배경숙 교수 제공
   배인철은 어떻게 해방직후 고향 인천에서 만들어진 문화예술단체의 대표를 맡게 됐을까. 이는 그의 피억압 계층에 대한 탐구정신이 민족예술로 승화됐고, 또 집안의 부(富)가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신예술가협회 결성을 주도한 그는 지금의 중구청 뒤편에 있던 인천에서 제일 큰 일본인 요정 긴스이(銀水)를 접수해 '예술가의 집' 간판을 내걸고 중앙의 시인 화가 조각가 20여 명을 모아 한때 공동생활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집안의 돈을 활동공간이 부족하던 예술인들에게 아낌없이 썼다는 얘기다.

   윤영천 인하대 교수는 배인철을 작품적 실천이 뒷받침된 문학운동가로 바라보고 있다. 그는 "배인철은 월북문인도 아니고 명망가 시인은 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편 안되는 그의 시가 그 나름의 문학사적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세계지배를 목표한 제국주의 국가간의 식민지 재분할 전쟁이었던 제2차대전의 전승국으로서 전후 자본주의권의 주도세력으로 부상, 분단된 남한에 진주한 미국의 실체적 의미를 그의 흑인시에서 바르게 형상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한다.

   배인철은 1920년대 부산에서 인천으로 이사한 배명선의 4남 5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인천 제일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앙고보(1934. 4. 1~1940. 3. 5)를 거쳐 일본 니혼(日本)대학(1940~1942) 영문과에서 공부했다. 배인철은 일본 유학시절 권투도 하고, 흑인문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배경숙 교수는 "오빠가 늘 보던 책이 있었는데, 그 첫 머리의 '모든 인간은 동등하게 창조됐다'는 글귀가 아직도 기억난다"면서 "백인들의 흑인 멸시에 대해 오빠는 유난히 분개했다"고 떠올렸다. 배인철이 권투를 한 것도 일제에 대항하기 위한 측면이었다고 배 교수는 전했다. 실제로 배인철은 우리나라 사람이나 흑인들을 괴롭히며 거들먹거리는 백인들을 뛰어난 권투실력으로 혼내주곤 했단다.

   일본 유학을 중도에 접은 그는 귀국 후 일제의 징용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가 거기서 무역업을 하던 큰 형 배인복과 함께 지내기도 했다.

   해방 직후엔 인천중학교(현 제물포고)에서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당시 교장이던 길영희 선생의 권유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또 진해 해양대학에서 근무하기도 한 배인철의 본격적인 작품활동은 조선문학가동맹에서 펴낸 '1946년판 조선시집'(아문각, 1947)에 '인종선(人種線)-흑인 쫀슨에게'를 발표한 때부터 '암살'된 1947년 5월까지라고 볼 수 있다.

   배인철의 죽음을 우익테러에 의한 것으로 보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가 1946년 11월의 남로당 결성에 깊이 관여했고, 월북시인 이병철과 우익 청년단체를 이끌던 김두한의 밀회장면을 목격했다는 점 등이 그 근거로 꼽힌다.

   배경숙 교수는 또 배인철의 죽음 직후 있었던 웃지못할 해프닝도 소개했다. "오빠가 남산에서 쓰러진 뒤 옮겨진 세브란스병원에서 오빠의 뇌를 실험용으로 기증하라고 했었어요. 그래서 약물에 오빠의 뇌를 넣으려는 의사와 큰오빠가 크게 싸우기도 했어요." 배 교수는 오빠의 뇌가 의사에게 연구대상으로 호기심이 갔었기 때문으로 풀이했다.

   배인철이 죽자 서울의 수많은 문인들이 인천에 내려와 직접 상여를 메고, 공동묘지까지 갔다고 한다. 이들은 또 그의 무덤 앞에 '인민의 시인 배인철의 묘'란 비명의 비석도 세웠단다. 이 비는 지금의 신기촌 진흥아파트 주변이 개발되면서 묘지 이장 때 땅에 묻히고 말았다. 이 점을 배경숙 교수 등 가족은 크게 애석해 하고 있다.

   부잣집 출신인 배인철은 왜 약자에 천착했을까. 그의 천성이 약자에 있었던 것 같다. 고급 옷을 사도 며칠 뒤면 누군가에게 벗어줄 정도로 가진 것이 무엇이든지 못사는 사람을 보면 가만 있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부모님 성격을 타고났다고 한다.

   세상에 알려진 배인철의 작품은 고작 5편 정도다. 노예 해안, 흑인녀, 인종선-흑인 쫀슨에게, 쪼 루이스에게-세계권투선수권 쟁탈전 쪼 루이스 대 빌이 콘:6월 22일 양키 스타디움, 흑인부대 등이다. 모두 평등하게 태어났으면서도 백인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흑인들의 서글픈 처지를 읊은 것들이다. 배인철에게 흑인 처지는 바로 일제에 짓밟히고, 다시 미국에 침탈당한 조선민족의 아픔이었던 것이다.

   배경숙 교수는 여기에 '어린 쿠리'란 제목의 시 등 몇 편의 시가 더 있을 텐데 도무지 찾지를 못하겠다고 했다.

   배인철의 죽음에 얽힌 진실 밝히기와 그의 나머지 작품세계 탐구는 이제 후대의 몫으로 남았다.

▲1946년 1월 인천중학교(현 제물포고)를 떠나 진해 해양대학으로 자리를 옮길 때의 모습. 맨 앞줄 가운데 두루마기를 입고 있는 이가 길영희 교장이고 그 왼쪽 중절모자를 든 이가 배인철이다. 사진제목은 '영어선생 배인철 시인을 석별하며'로 돼 있다./길영희 선생 추모문집



<정진오기자·schild@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