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복개, 예견된 철거=90년 수원시가 도심권 교통난 해소를 목표로 내걸며 수원천 복개는 시작됐다. 생활 하수로 악취를 풍기던 당시 수원천의 남루한 모습도 복개의 빌미를 제공했다.
따라서 최초계획은 매교에서부터 매향교까지 총 1.23㎞를 덮는 것을 목표로 91년 착공했다. 그러나 1단계(매교~지동교) 공사를 마치고 난뒤 막 2단계 공사에 착수했던 94년부터 시민단체의 반발에 부딪히며 격렬한 찬반논쟁으로 빠져들었다.
당시 수원지역 15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수원천 되살리기 시민운동본부'는 수원천의 문화역사적 생태적 가치를 내세워 강력한 반대운동을 펼쳤고 결국 96년 시로부터 사업 중단 선언을 이끌어 냈다.
순수 시민의 힘으로 이미 공사가 진행중인 사업을 중단시켰다는 점에서 당시 수원시민단체가 이끌어낸 성과는 한국 시민운동사에 한 획을 그었다.
◇자연형 하천의 원조로 부활=수원시는 시민단체와 함께 1단계 복개구간을 제외한 상류구간인 경기교~영연교(1.2㎞) 구간을 자연형 하천으로 조성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20년 이상 최악의 수질로 방치돼있던 수원천을 되살린다는 것은 당시로선 아무도 장담하기 힘든 고된 작업이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수원천은 여름엔 아이들이 물장구를 치고 놀고 겨울엔 썰매를 타는 생태하천으로 완벽하게 복원됐다. 고마리, 창포, 갈대, 버드나무가 우거진 녹지대를 만들고 버들치, 개구리도 찾아왔다. 악취로 접하기조차 힘들던 오염된 도심 하천이 자연형 하천으로 복원되기는 수원천이 국내에서 처음이었다. 수원천은 복개중단이라는 전대미문의 성과에 이어 한국 생태하천 1호라는 자랑스런 훈장도 달게 됐다. 이같은 생태하천으로서 성공적 변신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늘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1단계 복개구간은 여전히 암흑에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복개철거 결정은 수원천의 완벽한 복원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지난 연말에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수원천 가꾸기 아이디어 공모전이 열리기도 했다. 청소년들의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천연색 수원천의 미래를 설계했다.
21세기수원만들기협의회 이근호 사무국장은 "아이들의 순박한 꿈이 수원천의 미래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것"이라며 "마지막 남은 복개구간도 시민의 사랑과 적극적인 참여로 아름답게 복원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이름으로 본 역사속 수원천
수원천은 시대에 따라 중요한 역사적 사건과 어울려 시대정신을 함유하는 이름을 가졌었다. 고려말 이전까지는 수원천 지명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수원천을 끼고 광옥산(광교산) 행궁이 만들어지고 80암자가 형성됐을 정도로 중요하게 인식됐다.
이후 고려말 한림학사 이고는 '수원군읍지'에서 수원천을 망천(忘川)이라 했다. 이는 고려가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붕괴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을 외치며 팔달산에 은거하며 수원천에서 마지막 인생을 보내면서 지은 이름이었다. 이고는 수원천을 지조(志操)의 천으로 삼은 것이다.
수원천이 다시금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등장한 것은 정조의 현륭원 천봉과 화성건설에 즈음해서다. 정조가 팔달산에 화성을 짓게 된 것은 17세기 실학의 선구자인 반계 유형원의 영향이 컸다. 유형원이 이 지역을 중요하게 여긴 것은 다름 아닌 수원천 때문이었는데 그는 자신의 저서 반계수록에 "북쪽 들 가운데 임천(臨川)의 지세를 보고 생각하니(중략) 참으로 대번진(크게 번영할 땅)이 될 기상이다"고 기록했다.
정조는 이에대해 "현륭원이 있는 곳은 화산(花山)이고 이 부(府)는 유천(柳川, 버드내)이다"면서 "화산과 유천이 서로 바라보고 있으니 우리나라의 억만년 유구한 태평시대를 여는 기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글은 화성사업소 김준혁 학예연구사의 '문화로 본 수원천'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복개철거 어떻게 진행되나
▲기본계획수립(2007.7)
▲투융자심사 및 시민의견수렴 (2007.7~11)
▲기본설계(2008.3)
▲실시설계 및 철거공사 착공(2008.4~7)
▲하천복원공사 착공(2008.8)
▲준공(2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