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와 계속 항암제를 투여 받으면서도 그는 7월19일 인천 문학경기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올스타전에 시구자로 나서 경기장을 가득 메운 이들에게 진한 감동을 선사했다. 그리고 꼭 한 달 뒤인 8월19일 급작스런 호흡곤란으로 다시 병원으로 돌아간 그는 의료진이 호흡을 돌리기 위해 목에 구멍을 뚫어 폐에 관을 투입하자 손가락으로 장남 박홍원의 손바닥에 '빼'라고 쓰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의료진도 고개를 저으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가족에게 알렸고 그가 생전에 유니폼을 입고 떠나고 싶다는 뜻을 받들어 장남 박홍원이 준비해둔 슬라이딩팬티부터 하나하나 유니폼을 입히자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던 얼굴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고 마지막으로 모자를 씌우자 마침내 얼굴에 미소를 띠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니폼을 다 갖춰드리자 그는 편안해진 얼굴로 거짓말처럼 눈을 감았다.'
'인천야구 한 세기'는 야구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스러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아시아의 철인' 박현식(朴賢植·1929.3.11~2005.8.20)의 임종 순간을 이처럼 기술했다.
1954년 제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부터 1965년 제6회 대회까지 11년간 국가대표로 활약했으며 20여 년간 112개의 홈런(비공식)을 기록한 한국 야구계의 거목 박현식은 2005년 8월20일 0시30분 우리 곁을 떠났고, 대한야구협회와 한국야구위원회는 그의 장례를 최초로 '야구인장'으로 거행했다.
1929년 3월11일 평안남도 진남포시 후포리에서 4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난 박현식은 7세가 되던 해 가족과 함께 인천으로 내려와 중구 송현동에 정착했다. 그는 창영소학교(현 창영초등학교)를 거쳐 동산중학교(당시 6년제)에 입학, 3학년(1946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다. 당시 동산중의 상업교사로 재직하며 야구 감독을 겸하게 된 둘째 형 박현덕의 권유가 크게 작용했다. 또 너무나도 궁핍한 시절, 야구부원으로 활동하면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 그의 마음을 동하게 했다. 박현식은 1945년 6월 창단한 동산야구 1기 멤버로 참여하며 그 출발점에 선 것이다.
당시 28세의 혈기왕성한 나이로 엄하게 선수들을 다뤘던 박현덕 감독의 진두지휘 아래 동산야구의 개척자들로 필드를 누볐던 이들은 박현식을 비롯, 하명호, 이근배, 한명진, 황우겸, 정진철, 최광풍, 문동현, 윤태섭 등이다.
이들은 인천학생야구를 주도했다. 동산중은 해방직후부터 6·25가 발발하는 1950년 이전까지 청룡기와 황금사자기의 경기도 대표로 출전하며 지역 최강자로 군림했고, 그 중심에는 투수이자 팀의 4번 타자였던 박현식이 있었다.
당시 인천상업(현 인천고) 선수들은 동산을 넘어설 수 없어서 속앓이를 적잖게 했다 한다.
박현식의 볼은 위력적이었다. 동산 1기 멤버로 박현식과 함께 뛰었으며, 인천시청 감독을 역임했던 하명호(77) 전 인천시청야구팀 감독은 "당시 우리들보다 공수주 모든 부문에서 수준이 훨씬 위였다"며 "투수로는 전국에서 최고 수준이었다"고 중학시절의 박현식을 평가했다.
이렇듯 당시 학교 야구선수 중 최고의 실력자였던 박현식.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박현식에게는 가난이라는 굴레가 그를 좇아다녔고, 이는 두 번의 선택 기로에 선 그에게 모두 돈을 택하게 만든다.
박현식은 1년 여 동안 경기중학의 유니폼을 입었다. 당시 경기중은 스스로 전국 최강의 실력이라고 자부했지만, 1947년 제1회 황금사자기 결승에서 장태영이 버틴 경남중학에 패한 이후, 복수전을 위해 구위가 남달랐던 동산의 박현식을 집과 생활자금을 지원해주는 조건으로 스카우트해 간 것이다.
하명호 전 감독은 "동산야구의 개척자였던 우리들은 힘든 현실에서 야구를 해나가고 있었다. 그러한 시기에 현식이가 떠난다고 말했을 때 팀 동료들은 배신감마저 느꼈다. 하지만 붙잡을 수도 없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친형이었던 박현덕 감독도 그를 순순히 보냈던 점에서 당시 어떠한 상황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박현식은 졸업을 앞두고 또 한 번 선택의 기로에 선다. 동산중을 졸업하면서 우등상을 받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던 그는 서울대 상대에 합격했지만 조선운수(현 대한통운)에서 서울 용산구 도원동에 집 한 채를 주는 조건으로 스카우트를 제의해 왔다. 인천에 정착한 지 20년이 됐지만 집 한 채 마련하지 못한 부모님을 위해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실업무대로 자리를 옮겼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피난길을 떠나기 위해 짐을 챙기는 야구선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배트와 글러브를 먼저 챙겨 나섰다고 한다. 물론 전쟁통에 야구는 2년간 중단됐다. 박현식도 전쟁이 나자 1950년 가을 대구 훈련소에 입대했다. 그리고 1·4 후퇴때 부산에서 우연한 기회에 미군 병참부대원들과 야구를 하게 된 박현식은 미8군 대회에까지 출전해 미군들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투수와 타자부문에서 맹활약, 소속부대를 우승시켰다.
종전 후 1955년 박현식은 창단을 준비하던 육군으로부터 받은 스카우트 제의를 수락, 학생야구시절 라이벌이었던 장태영과 김양중, 김정관 등과 육군팀에서 뛰며 육군의 전성시대를 이끈다. 1959년 군 제대 후 농업은행(현 농협)에 입단한 박현식은 1962년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그리고는 이튿날 경기인 농업은행과 한국전력의 경기를 라디오를 통해 청취한다. 5회초 3-4로 소속팀이 지고 있는 순간에 박현식은 환자복을 입은 상태로 택시를 타고 운동장으로 향했다. 환자복 위에 유니폼을 껴입고 대타로 타석에 들어서서 역전 홈런을 날렸다.
박현식의 이름을 아시아에 확실히 각인시킨 경기는 대표 선수 마지막이던 1963년 제6회 아시아선수권에서의 일본과의 경기였다. 1회초 일본에 한점을 먼저 내주었으나, 박현식이 1회말 곧바로 장쾌한 홈런을 날려 1-1 원점으로 만들었고, 결국 아시아 선수권에서 일본을 처음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하는 감격을 누렸다. 당시 신용균 전 쌍방울 감독이 투수로, 김응룡 전 삼성 감독과 박현식이 3번과 4번 타자를 맡았다.
이 밖에도 1959년 국제군인야구선수권에서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장외홈런을 날려 필리핀 리잘 경기장에 '박현식존'을 만들게 했으며, 1964년 대통령배 실업연맹전 최다 출루상, 1966년 대통령배 실업연맹전 최다 홈런상, 아시아선수권대회 최다 출전(1~6회)해 필리핀에서 열린 제6회 대회에서 '아시아의 철인'으로 특별상을 받는 등 한국야구계에서 전무후무할 기록들을 쏟아내며 선수생활을 펼쳐나갔다.
하지만 '슈퍼스타는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항간의 속설은 박현식에게도 적용됐다.
1969년부터 12년간 경기도야구협회 사무국장을 거쳤으며 프로야구가 창단한 해인 1982년부터 삼미 슈퍼스타즈, 청보 핀토스, 태평양 돌핀스 등의 기록원으로 활동하며 박현식을 봐왔던 강대진(64)씨는 "선수 시절 슈퍼스타셨으며, 그 건장한 체격에 우선적으로 후배들이 주눅들었었다"며 "당신께선 야구만 알면서 그것을 위해 노력해 많은 것을 이뤘는데, 후학들은 그렇지 못하다. 때문에 당신의 기대에 못 미치면 많이 답답해 하셨다"고 회상했다.
아울러 박현식이 1982년 프로야구 삼미슈퍼스타즈의 초대 감독으로 최단기에 낙마한 불운한 지도자로 뇌리에 각인되어 있지만, 그의 야구에 대한 열정과 사랑을 뒤흔들진 못한다. 현재 고 박현식 감독의 유족들은 인천시에 훈장 추서를 건의 중이다. 유족 측은 "최근 박치기 왕이었던 프로 레슬러 고 김일 선수도 프로 선수로 체육 훈장으로 최고의 영예인 청룡장을 수상했던 바, 고 박현식 감독에게도 훈장이 추서된다면 인천의 영광일 뿐만 아니라 야구인으로서 최초로 야구인장으로 장례식을 치렀고, 훈장 또한 야구인 최초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소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저자 박민규씨는 '인천야구 한 세기'에서 고 박현식 감독을 이렇게 기리고 있다.
'아마도 감독님은 이 세상에 출루했다 지금 막 생환하신, 가서 야구는 아름다운 것이었다고 노래할 우리 모두의 영원한 슈퍼스타일 것이다. 할 수 있다면, 지금 홈플레이트를 힘차게 밟고 돌아서는 저 홈런타자를 위해, 우리 모두의 박수와 환호를 원음 그대로 전해드리고 싶다. 영면하소서 감독님, 우리의 슈퍼스타시여'.
<김영준기자·kyj@kyeongin.com>김영준기자·kyj@kyeongin.com>